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옛사람들의 웅숭깊은 밥사발

권영상 2016. 10. 23. 11:52

옛사람들의 웅숭깊은 밥사발

권영상




지난 일요일, 먼 집안의 혼사가 있었다. 혼례식장이 가까이도 아닌 횡성이었다. 일이 바쁘다는 아내를 데리고 나섰다. 그때부터 아내는 마음이 불편했다. 혼자 슬쩍 다녀오지 바쁜 저를 꼭 데려가야 하느냐, 였다. 끝내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그 문제를 다시 꺼냈다. 그도 그럴 만 했다. 일요일 오후, 가을철 영동고속도로의 상행길 정체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온몸을 뒤척이던 아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불만을 너그러이 받아주지 못했다. 집안 혼사에 가는 게 당연한 도리가 아니냐며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덩치도 크니 그릇도 큰 줄 알았는데 사람을 잘못 보고 살았다며 아내가 한숨 섞인 넋두리를 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내 방에 불을 켜고 앉았다. 이왕 동행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좋은 마음으로 와 줄 것이지 꼭 그런 내색을 해야하는지, 나는 속으로 아내를 탓했다. 그러는 내 눈에 문득 장조카가 준 사발그릇 한 벌이 들어왔다. 아직 마땅히 놓을 자리가 없어 그냥 키 낮은 책장 위에 올려놓은 거다.



지난여름 고향에 들렀을 때다. 장조카가 내게 오래된 사발그릇 한 벌을 가져가라며 내밀었다. 나는 이런 고랫적 밥그릇을 어디에 쓸 거냐며 거절했지만 조카는 기어이 그걸 내 차에 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까맣게 잊고 지내던 끝에 그걸 내 방에 들여놓았다.

그 밥사발과 국대접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사발 치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연한 푸른 빛이 은은하다. 근데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건 그 턱없이 큰 크기와 무게와 순박한 디자인이다. 지금 누가 이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아준다면 나는 그 밥그릇의 기세에 꺾여 밥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 크기로 말하자면 지금의 젊은이 서넛은 먹고도 남을 만하다. 무엇보다 그 웅숭깊은 깊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옛사람들은 날마다 이렇게 큰 밥그릇과 마주 했을 테다. 이렇게 큰 밥그릇을 쥐고 설거지를 했을 테고, 그 큰 밥그릇에 맞게 한솥 넉넉히 밥을 짓고 밥을 펐을 테고, 그 밥그릇 앞에 앉아 밥그릇의 밥을 비웠을 테다. 그러느라 옛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의 마음도 사발그릇의 웅숭깊은 크기만큼 키워갔을지 모른다. 과거엔 한 지붕 아래에서 여러 식구가 얼굴을 맞대고 살았을 테니 미운 일도 받아들이고, 눈에 걸리고, 귀에 거슬리는 일도 받아들여 삭이며 살아야 하는 큰 마음이 필요했을 거다.



사람이란 밥상의 밥그릇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다. 옛사람들이 밥그릇을 키운 까닭은 밥보다 마음의 그릇을 키우라 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의 밥그릇은 그 시절에 비하면 반찬그릇만도 못하게 작다. 밥그릇이 작아진 만큼 어쩌면 점점 나의 그릇도 작아져온 게 아닌가 싶다. 웬만하면 참을 수 있는 남의 말쯤 참지 못한다. 웬만하면 참을 수 있는 남의 실수쯤 너그러이 보아 넘기지 못한다. 남의 실책쯤 모른 척 덮어주기 보다 내 옹졸한 그릇의 크기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책상에 내려놓은 밥사발을 바라보다 그에게 적당한 자리를 잡아주기로 했다. 컴퓨터 옆자리 마우스를 집는 그 가까이에 두기로 했다. 날마다 밥사발의 이 웅숭깊은 크기를 들여다 보며 아내에게 그릇 작다는 소리만은 좀 면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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