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내 마음의 뜰안을 살펴볼 때

권영상 2016. 10. 27. 22:44

내 마음의 뜰안을 살펴볼 때

권영상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연다. 비 끝이라 바람이 차다. 하룻밤 사이에 초겨울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창밖에 선 산딸나무 잎이 다 떨어지고 끄트머리에 몇 남아있다. 꽃밭에 서있던 백일홍도 간밤 비의 무게에 못이겨 쓰러졌다. 한 계절이 가고 또 이렇게 오고 있다.

마당에 나가 떨어진 가랑잎을 쓸어본다. 식전이라선지 손이 시리다. 비를 놓고 가랑이 사이에 두 손을 넣고 비벼본다. 안 되겠다. 방에 들어와 아침밥을 하며 라디오를 켰다.



가을날/ 빈손에 받아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문병란 시인의 꽃씨가 천천히 흘러나온다.



시를 듣고 보니, 아직 못한 게 있다. 꽃씨 받는 일이다. 아침을 먹고, 바지를 갈아입고, 장갑을 꼈다. 쓰러진 백일홍부터 일으켜 세웠다. 꽃은 아직도 붉고 싱싱하다. 백일홍 일어선 자리에 봉숭아가 핀다. 여름에 꽃 진 자리다. 초췌한 분홍 꽃이다. 계절을 잃고 피는 이 볼품없는 꽃도 피니까 꽃이다. 벌 한 마리 슬쩍슬쩍 들여다 보고 간다. 좋은 시절을 만나 꽃다운 꽃을 피우고 가는 꽃도 꽃이지만 찬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이 가련한 꽃도 꽃을 피우니 꽃이다. 가만히 살펴보려니 노란 꽃씨주머니도 달고 있다. 손바닥을 대고 꽃씨주머니를 터뜨린다. 갈색 꽃씨 두 알이 굴러나온다.



집 모퉁이 노랑분꽃씨를 받으러 가다가 보니 아뿔싸! 모과가 모과나무 발치에 떨어져 있다. 크고 샛노랗다. 모과를 집어 코에 댄다. 가을이 이 모과 속에 온전하게 배어든 모양이다. 모과향이 향긋하고 깊다. 지난해에 심은 모과나무에서 딱 하나 달린 게 이 모과다. 가을이 내게 이 옹골차고 샛노란 선물을 하고 갔다. 장갑으로 거죽을 닦아 마루 위에 놓았다. 아직 다 받지 못한 늦가을 햇볕을 좀 더 받기를 바라면서.



묵은 신문을 마루에 펼쳐놓았다. 거기다가 노랑 분꽃씨를 받아다 놓고, 나팔꽃씨를 받아다 놓고, 노랑 분홍 빨강 백일홍 꽃씨를 따로 받아다 놓았다. 프렌치 메리골드며 새들이 다 찍어먹고 남긴 해바라기 씨앗도 받아다 신문지 여기저기에 놓았다.

씨앗들이 볕에 마르는 동안 호미를 들고 쪽파밭으로 갔다. 쪽파밭에 또 두더지가 들었다. 땅속으로 구렁이가 지나간 것처럼 구불구불 두더지 자국이 났다. 땅 속을 파고 다녀도 꼭 쪽파 뿌리를 떠뒹기며 다닌다. 쪽파를 보자고 올여름 일찌감치 한 됫박을 사다가 두 개의 큰 두둑에다 정성껏 심었다. 그게 파랗게 잘 커올라 순무 대신 쪽파 심기 참 잘했다 했다.



근데 엊그제였다. 쪽파밭 가에 서 있는데 난데없이 두더지 한 놈이 내 발 밑을 돌아다녔다. 말로만 듣던 깜장 털빛이 자르르한 잉크병만한 두더지였다. 햇빛에 눈이 부셔 슥슥슥 땅속으로 숨어드는 게 신기해 그냥 두었는데, 그게 어제오늘 쪽파밭을 망치고 있다. 성한 쪽파라곤 밭 가장자리에 몇 포기 남아있을 뿐이다.

그 놈을 잡을 양으로 쪽파밭을 노려보다가, 땅에 귀를 대어보다가, 지주대로 들쑤셔보다가 돌아섰다. 대지의 오랜 주인들과 싸움을 걸어 이겨보겠다는 내가 싱거웠다.



대신 그 자리에 시금치 씨앗을 뿌렸다. 점점 날이 추워지지만 시금치는 눈 속에서도 끄덕없이 푸르게 살아낸다. 어쩌면 오늘 뿌리는 이 시금치 씨는 올해의 마지막 파종이 될지 모른다. 나는 삼동의 땅으로 들어가는 시금치 씨앗을 다 넣고 손을 털며 일어섰다. 겨울 준비를 위해 바깥뜰 정리를 했으니 이제는 내 마음의 안뜰을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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