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4

사다리가 있는 풍경

사다리가 있는 풍경 권영상 내려야할 전철역을 놓쳤다. 정신을 딴 데 파느라 한 정거장 더 가고 말았다. 역에서 내려 지상에 올라와 보니 알겠다. 봄이 깊다. 가로수들은 이미 녹음으로 우거졌고, 햇빛이 덥다. 놀이터를 지나고, 음식점 골목을 지나고, 한길을 건넌 뒤 느티나무 그늘 벤치에 잠시 앉았다. 무심코 눈이 가는 곳에 갤러리가 있다. 일어나 그리로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그림을 보는 이는 나 하나뿐.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성격이 다른 네 화가의 공동전시회다. 그 중에 내 눈에 띈 그림들이 있었다. 사다리를 주제로 한 풍경이다. 사다리는 이층 옥상에 세워져 있거나 이팝나무 꽃 가득 핀 나무 둥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사다리가 있는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내가 그 사다리..

모처럼 사람 구실을 하다

모처럼 사람 구실을 하다 권영상 동네 산을 오를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산 입구에서 100여 미터 걸어 오르는 도중에서 만나는 편백나무다. 사람으로서 차마 그 앞을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 죄스러웠다. 그 때마다 나는 속으로 미안하구나! 그 말을 했다.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한창 성장하는 편백나무다. 늠름한 그 나무에겐 생을 잃을지도 모를 아픈 상처가 있다. 다들 무심히 지나치고 만다면 아픔에 시달리다 종국에는 고사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든 실수 때문이다. 언제 어떤 일로 누가 저 나무 허리에 저렇게도 팽팽하게 로프를 묶어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모르기는 해도 그 나무와 길 건너 이쪽 어느 나무에 현수막이 걸렸던 듯하다. ‘산불 조심’ 아니면 ‘숲을 지킵시다’, ‘산사랑 나무 사랑’ 따위가 ..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천성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천성 권영상 시골에 집을 두고 9년을 지내면서도 그간 사다리 없이 살았다. 사다리가 뭣에 필요한데? 그게 사다리를 사지 않으려는 미련한 나의 방어막이었다. 하긴 손바닥만한 텃밭에 토마토 심고 무 심고 사는데 사다리가 대체 무엇에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기둥과 추녀에 방부용 오일 스테인을 칠할 때뿐이다. 그 일은 꼭 해야 되는 일이다. 방부 뿐 아니라 방수, 방충 효과까지 있으니 그럴 때면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일도 3년에 한 번씩 하는 작업이다. 근데 그 3년을 용케 발명해 내는 이가 있다. 한 시간 반 거리에 사는 막내조카다. 직장에 다니는 그는 뭘 만들고 고치고 조립하고 밝혀내는 걸 좋아한다. 아뭇소리 안 하는데도 제가 알아서 ‘페인트칠할 때 됐잖아요.’ 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