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스무 살
권 영 상
직장 때문에 동해안의 s시에 머물러 살 때다. 낯선 그 곳 생활에 도무지 정이 붙지 않았다. 장롱처럼 한 자리에 붙박혀 살지 못하는 나의 성미도 세상을 낯설게 만들었다. 마음을 붙이지 못하다 보니 한 해에 대여섯 번씩 하숙을 옮겼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직장 바로 곁에 있는, 옥상이 있는 집을 소개받았다. 그 집엔 글라디올러스가 한창 피고 있었다. 나는 그 집 글라디올러스에 반했다. 배나무 우거진, 고성처럼 우아한 하숙도 버리고 왔는데 그 집의 글라디올러스가 내 마음을 끌었다.
그 집엔 극성스런 ‘얘들아’가 있었다.
얘들아는 딸아이 여섯에 아들이 하나였다. 엄마는 그 애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대신 주로 ‘얘들아!’를 사용했다. 아침 잠을 깨울 때도 ‘얘들아, 일어나라!’ 했고, 밥을 먹을 때도 ‘얘들아 밥.’ 했다.
얘들아 중엔 대학을 다니는 둘째 딸아이가 있었다. 집안일을 도맡아 거들고, 도시락도 챙기고, 다들 좋아하는 음악도 틀어주고 그랬다. 그 집의 얘들아는 모두 성미가 괄괄한데 둘째만은 아니었다. 신중하고 꼼꼼한 편이었다. 엄마는 얘들아의 학교 성적에 관심이 많았다.
“둘째의 반만 닮아도 걱정 없겠는데.....”
그만큼 둘째는 집안 동생들 일을 챙기고도 그의 학교 성적은 남달랐다. 얘들아가 학교에 갈 때면 차 조심해라, 싸움 조심해라, 늘 잔소리를 했지만 둘째가 나가면 문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둘째는 아이들을 가르쳐 용돈도 벌었다. 그 말고도 틈틈히 아버지의 전등가게 일도 돌보았다. 어찌 보면 고단한 둘째였다.
그렇게 몇 달을 살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선생님 속 썩이지 말고 죽서루 구경 잘 하고 오렴.”
얘들아의 아버지가 뜻밖에도 내게 그 엄청난 일을 맡기셨다. 말썽꾸러기 얘들아를 데리고 나는 죽서루의 벚꽃을 보러 갔다. 풀려난 망아지들처럼 얘들아들은 내 시야 밖으로 흩어졌다 모였다 했다. 나는 얘들아 중 한 아이라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했다. 양떼를 몰듯이 나는 얘들아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 때였다.
“제 손 좀 잡아주실래요?”
등 뒤에서 둘째의 목소리가 났다.
둘째가 조용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둘째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뽀얀 손. 나는 둘째의 손을 말없이 내려다 봤다. 말썽꾸러기 얘들아의 손은 아무 때고도 잡아주었지만 신중한 둘째의 손만은 망설여졌다.
“좀 잡아주심 안 되나요?”
둘째가 나를 올려다 봤다. 그의 눈이 외로워 보였다. 나는 그의 외로움을 이해했다. 대학을 다니고, 집안팎의 일을 하고, 가게 일을 돕고, 동생들을 보살피고, 그러면서도 부모로부터 손 한번 잡혀보지 못한 외로움. 나는 둘째의 눈길을 말없이 피했다.
그 일이 있고 얘들아 집에서 일 년을 채운 뒤 나는 직장을 옮겼다. 글라디올러스가 피던 그 집을 떠날 때 둘째는 내게 그녀의 뽀얀 손 대신 장갑을 선물로 주고 돌아섰다.
세월이 모든 걸 잊게 한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30년도 더 되어가는 아득한 세월 속의 일인데도 가끔 글라디올러스를 보면 내 기억은 그때로 돌아간다. 지금은 뭐하며 살까? 이름도 얼굴도 다 잊어버린, 내 기억의 영토 속에 스무 살 나이로 남아 있는 얘들아 집의 그 둘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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