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는 선물
권영상
약속 날짜를 몇 번 어긴 끝에 간신히 영훈이랑 만났다. 영훈이는 40대 중반, 딸이 하나 있는 아빠다. 나는 그의 학창시절 그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어느 학년엔가 그의 담임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교직에서 물러났고, 그는 맨하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그림과 제 밥벌이를 성실하게 하고 있다.
어제 그와 광장시장에서 만났다. 바쁜 중에도 우리는 만났다. 만나 술을 먹고 그의 그림 이야기와 아이 키우는 이야기, 그리고 나의 사는 이야기를 한다. 마음이 맞는 친구처럼 산 지 20년이 넘었다. 우리는 전통 시장을 돌며 오랜만에 색색이 옷이며 옷감, 실타래, 이불을 눈이 호사스러울 만큼 봤다. 씨앗가게도 기웃거렸다. 그리고 목로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수많은 술꾼들의 대열에 끼어앉았다.
작년에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이맘때에도 우리는 만났다. 그땐 4월의 남산길을 걷자며 을지로 5가에서 출발해 대한극장을 지나 컴컴한 남산한옥마을로 들어섰다. 우리는 그쯤에서 남산길로 나가는 통로를 찾지 못한 채 다람쥐처럼 필동의 산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결국 길을 잃은 채 장충동으로 내려갔다. 그때 영훈이는 사업장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늦었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날 밤, 10시 무렵, 늦은 술을 마시는 술집 창밖에 라일락이 한창 향기를 뿜고 있었다.
영훈이와 그날의 일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다.
누가 내 등을 가볍게 쳤다. 돌아다보니 낯선 남자분이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밑을 가리켰다. 거기 뒷주머니에 넣어둔 내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볼일을 보러 나가던 옆자리 분이다. 나는 얼른 일어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조용히 술집 주인을 찾았다.
“제 마음을 좀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며 고작 술 세 병을 감사의 인사로, 대신 좀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마음은 알겠는데 저분들 마실 만큼 마셨으니, 한 병만 드려도 됩니다.” 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술집 주인이 있다니! 술 세 병을 원하는데 한 병만 권하는 주인의 마음이 놀라웠다. 막무가내는 나를 설득하기 어려워선지 주인께서 그분이 듣도록 한 병만 드려도 됩니다! 했다. 말 실랑이를 들은 그분이 손사래를 쳤다.
“주인장 말씀처럼 양껏 마셨습니다. 그러니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러고는 술을 마쳤다며 다들 일어섰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들과 작별했다. 나도 성훈이랑 일어섰다. 술집을 나오다가 잠깐 종묘가게에 들렀다. 백합 두 뿌리를 샀다. 마음만 받겠다는 그 옆자리 분에게 마음만 드리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마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영훈이 사무실 창가에 백합 둘을 키워보는 일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영훈이에게 백합을 건넸다. 극구 사양하던 그가 작약 두 뿌리를 골랐다.
“선생님 마당에 심어놓고 꽃 보세요. 제 마음입니다.”
실랑이 끝에 내가 또 지고 말았다.
“네 마음을 이렇게 고맙게 받는구나!”
그날은 밤이 늦도록 마음이라는 선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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