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봄길

권영상 2016. 4. 5. 22:08

봄길

권영상

    

 

 


꽃씨 온상에 뿌린 꽃씨들이 모두 나왔습니다. 그 예쁜 걸 들여다보다가 일어섭니다. 새삼스럽게 어디 먼데가 그립습니다. 언젠가 가 본 그 자리에도 봄은 왔는지, 그 들길에도 제비꽃은 피었는지, 개울물은 흐르는. 지금쯤 거기에 노랑턱멧새가 봄길을 따라와 그때처럼 울고 있는지. 뭐 이런.

거기에 가 보자는 생각이 문득 일었습니다. 지난겨울에 가본 저수지입니다. 이제는 연둣빛으로 물들었을 물버들 숲 사이로 난 봄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가는 김에 슈퍼에서 사올 것들을 포스트잇에 적었습니다. 양상추, 사과, 피망, 리챔햄, 감자 1봉지, 우유. 서울 집에서 가져온 채소들이 달랑달랑합니다.




차를 몰아 집을 나섰습니다. 오후 2시 무렵의 봄볕이 달콤합니다. 봄날치고 따스하고 화창합니다. 구름 한 장 없는 325번 삼백로를 달립니다. 벚나무 가로수 가지가 치렁치렁합니다. 벚꽃망울이 통통 불었습니다. 꽃물이 가득 찼습니다. 꽃이 피려면 일 주일은 걸리겠지만 나무빛은 벌써 붉은 물이 돕니다.

농협 마트를 지나, 우체국에서 우회전을 했습니다. 민가 서너 채를 지나는데 울타리가 개나리꽃으로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앤디워홀의 드로잉 마돈나의 퍼머넌트 머리처럼 샛노랗습니다.




거기서 5분을 달렸을까요? 내가 가려던 그 저수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주차지를 지나 두 번째 주차지에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저수지 파란 바람이 내 품에 안깁니다. 계단을 걸어 저수지 둑길에 내려섰습니다. 둑길이라기보다는 저수지 물이 찰방대는 물 가장자리로 난 좁은 길입니다. 물가 버들숲 버들강아지가 글쎄 노랗게 폈습니다. 내 몸이 다 노랗게 물들 만큼 봄길이 환합니다. 마른 길엔 봄쑥이 뽀얗게 나왔고, 이제 민들레가 여기저기 금단추꽃을 피웁니다.





쪼빗쪼빗조빗

노랑턱멧새가 잊지않고 마중을 나와 주었네요. 턱에 노란 스카프를 하고 머리에 노란 줄무늬 모자를 쓴 녀석입니다. 그 녀석이 물가에 난 버드나무를 홀짝홀짝 건너뛰며 나랑 발을 맞추어 줍니다. 요렇게도 앙증맞은 봄새가 있을까요. 조금 감다가둔 색실뭉치 같네요. 노랑턱멧새 노래를 들을랴고 물가가 조용합니다.

물가 마늘밭에 마늘이 큽니다. 양파도 파랗게 큽니다. 마늘밭 아래 웅덩이엔 미나리가 초록빛을 잔뜩 키워올렸습니다. 봄이 길어내는 초록빛이란 참 정갈하기도 하지요. 눈이 어릴 만큼 환합니다. 미나리 햇줄기를 하나 끊어 코에 댑니다. 상큼하고 화아한 미나리 향이 코를 자극합니다.




길을 가다가 민들레꽃 앞에도 앉아 보고, 쇠뜨기가 꽃피운 뱀밥 앞에도 앉아보고, 마른 풀섶을 뚫고 나온 보랏빛 현호색 앞에도 앉아 보고, 그러다가 저수지에 어리는 건너편 마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자락 양지짝에 나란히 앉은 몇 안 되는 집이며 비닐하우스며, 울담의 매화꽃이며, 파란 하늘과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이 저수지물에 잔잔히 얼비칩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었지요. 참 좋은 풍경입니다. 건너편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휘두르는 풍경까지 물 위에 그대로 비칩니다. 바라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겨울 시린 바람에 덧나던 마음 상처들이 얼비치는 마을 풍경에 다 지워지는 듯합니다.





물수제비를 날려볼 생각으로 조각돌 하나를 집어들고 허리를 숙일 때입니다. 버들 숲에서 뭔가 첨벙대더니 후두두 날아오릅니다인기척에 놀란 물오리 대여섯 마리가 살찐 몸을 들어 올려 저쪽으로 날아갑니다. 내가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지요

버들 숲에서 툭 튕겨져 나온 주먹돌멩이 하나가 물수제비를 뜨듯 물을 튕기며 수면 위로 달려나갑니다. 언뜻 보아도 알만한 농병아리입니다. 농병아리 한 놈이 담방담방담방, 물을 차며 저만큼 달려나가더니 뚝 멈추고 나를 돌아다봅니다. 나와 눈이 맞았다 하는 순간, 깜물 자맥질을 합니다. 한참 후 저쪽 물 위로 쏙 올라오더니 또 나를 흘끔 봅니다. 그러더니 또 물 속으로 들어가 저수지 한 복판으로 나가서야 아주 내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그다지 많이 걸은 건 아니지만 이쯤에서 풀빛이 파란 저수지 봄길걷기를 마치고 돌아섰습니다. 저수지의 반은 돌았습니다. 나머지 길은 다음에 또 걸어야겠지요. 돌아서서 갑니다. 오던 길이어도 거꾸로 가는 길이라 처음길처럼 낯설고 새롭습니다. 이렇게 좋은 봄나들이 길이 가까이에 있는 걸 모르고 먼 데만 그리워만 했습니다.

버드나무 곁에 서서 저수지 너머 흰 구름을 봅니다. 참 아름답네요. 한창 젊었을 땐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흰 구름이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참 정답게 느껴집니다. 무연히 허공중에 떠 있는 저것이 내가 살아온 그림자 같기도 하고, 내가 숨 쉬며 살아온 나의 숨결 같아 한편으로 눈물겹네요. 약동하는 봄길을 찾아왔는데 걸어보니 인생이 조금 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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