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말에 대하여

권영상 2015. 12. 9. 15:46

 

말에 대하여

권영상

 

 

 

 

언어는 사고에 선행한다는 말이 있다. 사고하기 이전에 이미 언어가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사고를 통해 언어가 만들어졌지만 오랜 언어생활을 통해 사람들의 추상적 생각은 차츰 기호화된 언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가용할 수 있는 언어 수량 안에서 사고하거나 사고를 향유한다.

딱하게도 시인들이 쓰는 말도 그런 제약 속에 있다. 언어로부터 가장 자유롭고 창조적이어야 할 그런 직분의 시인들마저 제한적인 언어라는 도구로 시를 다루어간다. 시적 정서를 언어로 환기시켜 간다는 말이다. 언어로 정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방식에는 음악적이거나 회화적, 또는 의미적 양태의 방식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초기적인 미학으로 먼저 음악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동시문학이 어린이 문학이고 보면, 점차적으로 발전해 나간 시각적 차원이라든가 모더니즘적 기술보다 음악적 운율미학이 먼저 논의 되어야할 것이다.

어린이 문학에 있어서 말이란 어떤 역할을 하나? 아직 일상어를 잘 터득하지 못하거나 언어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는 함축적인 말이나 이미지보다 접근성이 쉬운 것이 운율 언어이며 운율 미학적 기교일 것이다. 동시가 그 어느 장르보다 운율을 늘 염두에 두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는 소리 문자인 우리 말글의 재미, 말장난, 말놀이에 관한 동시가 여러 편 눈에 띄었고, 회화적 요소를 짙게 깔고 있는 짧은 시가 다량 발표되었다. 두 부류의 시를 통해 시에서의 말의 의미와 시어의 한계를 다시 새겨보려 한다.

 

 

 

1. 소리말의 유희와 이해

 

 

 

 

앞뜰에 있는 말뚝이 말 맬 말뚝이냐 말 안 맬 말뚝이냐// 저 선반 위에 있는 접시는 깨진 접시냐 안 깨진 접시냐// 저 건너 지붕에 콩깍지가 깐 콩깍지냐 안 깐 콩깍지냐. 깐 콩깍지면 어떻고 안 깐 콩깍지면 어떠냐. 깐 콩깍지나 안 깐 콩깍지나 콩깍지는 다 콩깍지인데// 작년에 온 솥 장수는 새 솥 장수고, 금년에 온 솥장수는 헌 솥 장수다// 앞집 팥죽은 붉은팥 폿팥죽이고, 뒷집 콩죽은 햇콩단콩 콩죽이고, 우리 집 깨죽은 검은깨 깨죽인데. 사람들은 붉은 팥 폿팥죽, 햇콩 단콩 콩죽, 검은깨 깨죽 먹기를 싫어하더라// 내가 그린 구름 그림은 새털구름 그린 구름 그림이고, 네가 그린 구름그림은 깃털구름 그린 구름 그림이다. (후략)

 

 

                                                                  김찬곤의 ‘국어 시간’ 일부 <동시마중> 2015년 가을호

 

 

 

돋아나는 새싹이/ 말 이빨을 닮았다는/ 마가목이 선 것을 보니/ 말머리는 저만치// 말발굽을 닮은/ 말발도리가/ 있는 것을 보니/ 앞발굽은 조오기쯤/ 뒷발굽은 요오기쯤// 말 오줌 냄새를/ 지독히 풍기는/ 말오줌나무가/ 자리 잡은 걸 보니/ 말 엉덩이는 바로 이만치// 낭창낭창한 회초리로/ 게으른 말 엉덩이/ 한 대 갈기려/ 말채나무 지금 막/ 말채 높이 들었다

 

                                               조동화의 ‘우리나라 나무 이름 익히기’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5년 가을호

 

 

 

두 시 모두 정서를 환기시키는 도구로 반복 운율을 사용하고 있다.

앞의 시 ‘국어 시간’은 국어 시간답게 발음하기 어려운 말을 소재로 하여 학습하는, 일종의 말놀이, 곧 언어유희 방식의 작품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저 콩깍지는 안 깐 콩깍지인가 깐 콩깍지인가’ 류다. 전반부의 세 가지 소재 ‘맬 말뚝’, ‘깨진 접시’, ‘깐 콩깍지’는 ‘안’ 부사가 들어가는 말과 짝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부분은 ‘팥죽’과 ‘콩죽’, ‘깨죽’과 ‘구름 그림’이라는 말에 발음하기 어려운 말을 앞에 얹어 놓았다. 발음하기 어렵도록 하기 위해 장치해놓은 건데 오히려 소리말의 묘미를 실감하게 하는 재미를 맛보게 한다.

이 시는 ‘국어 시간’답게 여러 형태의 말놀이말을 학습 소재를 다루었고, 이미 대중화된 소재를 시 속으로 끌어들여 공감의 폭을 넓히려는 의도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류의 시들은 그 특성이 그렇듯 의미의 전달적 기능보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운율성을 유희적 방식으로 드러내며 그게 또한 한계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뒤의 조동화의 시는 ‘말’이라는 말을 반복시켜 반복운율의 재미에 기대려는 듯하지만 실은 시의 제목처럼 나무 이름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성을 숨기고 있다. 그러니까 앞의 시가 말의 재미에 무게를 둔다면 뒤의 시는 나무 이름의 이해를 근간으로 한다. 이 시에는 네 가지의 ‘말’자가 붙는 나무, 마가목, 말발도리, 말오줌나무, 말채나무가 나온다. 그들을 배열하는데도 시인의 순차적 치밀성이 보인다. 마가목은 말의 앞부분인 ‘말 이빨’, 말발도리는 말의 중간부분인 ‘발굽’, 말오줌나무는 뒷부분인 ‘엉덩이’, 말채나무는 말의 맨 뒷부분인 ‘말채’ 식이다. 한 마리 말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네 개의 나무 이름을 욀 수 있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러한 배열의 고려에는 이 시가 이해를 목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2. 말이 가진 재미의 한계

 

 

 

당나귀가 좋아./ 당나귀를 그려./ 큰 당나귀도 작은 당나귀도 보통 당나귀도 그려./ 뛰는 당나귀도 웃는 당나귀도 먹는 당나귀도 그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이 나더러/ 이제부터 당나귀를 그리지 말래./이 세상에 노란 당나귀는 없대./ 괴물이래.// 흥./ 그렇다고 내가 안 그릴 줄 알아./ 선생님이 모르는 동물도 있는 거라구./ 그리고 꼭 이 세상에 있는 동물만/ 그려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당나귀를 그릴 거야./나만의 당나귀를.

                                                                 김개미의 ‘노란 당나귀’ 전문 <동시마중> 2015년 가을호

 

 

 

글쓰기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아왔다./기뻐할 줄 알았는데/ “장하다.”/ 그 말뿐.// 놀다가 다쳐/ 깁스를 하고 왔다./ 화낼 줄 알았는데/ “뭐-여.”/ 그 말뿐.// 기쁨도 아픔도/ 길게 늘이지 않고/꼬옥 접어서 말하는/ 우리 할아버지.

 

                                                                 문성란의 ‘접은 말’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5년 가을호

 

 

 

시에 있어서 말이 갖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두 시 모두에서 엿보인다. 말이란 무엇인가. 앞의 시에서 기능하는 말이 어떤 사실을 풀어놓거나 자신의 욕망을 진술하는 기능을 한다면 뒤의 시, 문성란의 ‘접은 말’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화의 욕망을 접고 또 접어서 내놓는 함축과 절제라는 점에서 두 시는 다르다.

 

 

앞의 김개미의 ‘노란 당나귀’는 크게 두 개의 의미망을 갖는다. 앞부분은 ‘노란 당나귀’로 접근해가가 위해 다양한 양태의 당나귀를 ‘당나귀’라는 반복운율로 재미있게 그려나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뒷부분은 앞부분의 정서와 판이하게 시가 정색을 하며 ‘나만의 당나귀’를 그릴 거라고 힘주어 말하는 화자의 의지와 욕망이 드러난다. 시의 정서가 이렇게 달라지는 데에는 전반부의 ‘당나귀’라는 반복운율이 후반부의 주제를 구현하는데 있어 얼마간의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풀어놓는 말과 동어반복의 재미를 살려내는 운율 위주의 시가 고민하는 바는 시어의 함축이나 절제로 향할 수밖에 없겠다. 시란 기본적으로 그 형식이 산문과 달리 많지 않은 언어들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 시가 독자와 상호 소통하려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와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정서망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 방식의 하나가 시어의 함축과 절제다.

문성란의 시 ‘접은 말’에 있어 “장하다.”와 “뭐-여.”가 그것이다. 운율을 지향하는 시가 대개 외부 지향적이라면 문성란의 ‘접은 말’은 내부 지향적이다. 독자들은 할아버지의 ‘장하다’라는 발화 이외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을 더 많이 상상해내거나 할아버지의 감정을 자제하는 의지와 그것을 통해 할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유추해낼 수 있다. 이걸로 보아 시에 있어 말의 절제란 오히려 활발한 소통으로 가는 열린 의지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3. 말의 회화성

 

 

 

몸체보다 소리가 더 길다// 몸체는 저만치 사라졌는데 아직도 플랫폼에 남아 있는 기적소리

                                                   

                                                                              -권오삼의 ‘기차’ 전문 <동시마중> 2015년 가을호

 

 

꿈을 담아/ 멀리도 던졌다.// 언제쯤 돌아올까?// 내가 바라던// 저// 부메랑.

             

                                                                      -서지희의 ‘갈매기’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5년 가을호

 

 

위 두 편 모두 이미지가 짙게 드러나는 짧은 형태의 시다.

권오삼의 ‘기차’는 권오삼 동시에서 보기 드문, 그의 시력에 비추어 본다면 이단적인 시다. 이 시엔 두 개의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가 있다. 시각이미지인 기차의 ‘몸체’와 플랫폼에 남아있는 청각이미지 ‘기적 소리’다. 몸체는 실제의 기차의 길이이며, 기적소리는 소리로 존재하는 여운이다. 여운과 실체의 길이를 비교하여 기적소리가 기차보다 더 길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청각을 시각화하여 시 전반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과 2연 밖에 안 되는 짧은 시지만 플랫폼에 길게 남아있는 기적소리의 여운으로 말미암아 수십 행 길이의 시 못지않은 호흡을 느끼게 한다. 이미지의 함량 때문에 기적소리를 오랫동안 향유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하나 ‘기적’이라는 연상 경험이 요구되는 시다.

 

 

뒤의 시, 서지희의 ‘갈매기’는 동시에서 쉽게 쓰이지 않는 은유의 방식으로 시를 모던하게 만들고 있다. 4연 6행의 시이지만 실은 불과 26음절밖에 안 되는 간소한 시다. 갈매기 이미지를 부메랑에 연결시킨 비유가 깔끔하고 현대적이다. 또한 어린이 독자를 잘 배려한 반짝이는 감각과 감수성과 친숙미가 보인다.

멀리 푸른 공간을 향해 날아가는 갈매기에겐 내가 실어 보내는 꿈이 있다. 바닷가에 나와 설 때마다 그 꿈을 실어보내기는 하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직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 꿈의 실현을 바라는 시다.

두 편 모두 회화적 조형미를 그려내는 기능에 충실하나, 메시지, 또는 영혼성이 약해지는 한계를 갖는다.

 

 

반복어와 반복운율로 말을 풀어내는 언어유희적 시와 가급적 말을 압축하거나 절제하는 시의 시도, 또는 간소한 시어로 긴 여운을 남기는 회화성 짙은 시까지 일별했다. 회화시가 아름다운 이미지 창출에 있다면 언어유희적 시는 즐거운 운율과 음악성을 창조하는데 있다. 회화시가 독자의 내적인 연상 활동을 요구한다면 언어유희적인 시는 내면 활동보다는 시의 운율을 따라가는 외적 활동을 요구한다. 시의 정서는 그런 활동에 의해 환기된다.

여기에 인용되지 못한 몇몇 시들, 김경진, 이세기, 김금래, 박승우, 이수경, 정두리, 이재순, 송선미 등의 시 또한 매우 특별했다. 너무 개별적이라 이렇게 저렇게 한데 묶어 언급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아동문학평론 2015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