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상원사 영산전 석탑이 내게 말한다

권영상 2015. 10. 21. 11:10

 

 

 

 

상원사 영산전 석탑이 내게 말한다

권영상

 

 

 

 

월정사를 지나 해탈교를 건너자, 단풍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가을이 한창 깊어가는 시월 중순의 토요일.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진부 1km’라는 표지판을 보는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그리움이 있었다. 오대산 상원사 경내에 있는 영산전 석탑이다. 가끔 강릉을 오가지만 그때마다 ‘다음에!’ 그러며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파란 가을하늘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진부 톨게이트를 향해 핸들을 돌렸다.

 

 

 

논벌에서 익던 벼들이 사라지고, 매표소로 가는 동산리 전나무길 옆 대파밭의 파들이 새파랗게 매운 빛을 키워내고 있다. 지금이 오대산 가을 축제다. 차량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다. 잘못 왔구나! 싶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 매표 후 다행히 길이 풀려 월정사를 지나고 해탈교를 건너 한 십여 분 더 달렸다. 거기가 한계였다.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이 막혔다. 길섶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선재길을 따라 걸어 올랐다.

생각보다 길은 멀었다.

 

 

 

오래 전, 상원사에 들른 적이 있다. 스무살 후반의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딸아이와 아내와 나, 그렇게 셋이 왔었다. 참나무 숲의 새순이 파랗게 필 때였다. 얼음장에서 풀려나온 계곡물은 듣기만 해도 차고 시렸고, 새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우리 셋이 찾아들어간 상원사는 고즈넉했다. 봄이 도는 산기운과 절간의 고적함을 찍는답시고 나는 추녀의 풍경이며 동종이며 절 뒷마당에 뜬 낮달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본당인 문수전을 나와 우측 위쪽에 위치한 영산전 마당에 올랐다.

영산전 뜰마당은 여느 곳과 달리 아늑하고 따스했다. 봄 햇살이 바쁘게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거기 서서 남녘으로 흘러가는 건너편 황병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다.

“아빠, 이 탑 좀 봐봐.”

딸아이가 영산전 마당에 서 있는 탑 앞에 쪼그려 앉아 나를 불렀다.

“여기 구름을 타고 놀러나온 가족이 있어.”

 

 

 

 

다가간 나와 아내에게 딸아이가 손가락으로 탑신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 앞에 모두 쪼그려 앉았다. 탑신에 사이좋은 세 식구 한 가족이 있다. 오랜 비바람에 닳은 불존 세 분이다. 딸아이 말대로 식구 같다. 따뜻한 봄날, 살찐 봄볕을 쬐러 나오신 모양이다. 얼핏 보아 신라불상 양식이다. 보드라운 살결에, 작고 동그란 어깨에, 통통한 입술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아니면 봄볕 자리를 서로 양보하고 계신 듯 한 모습이다.

가만히 보려니 거기만이 아니었다. 사면에, 또는 오층인 듯 쌓아올린 탑신마다 삼존 또는 사존의 부처님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서너 걸음 물러서서 석탑을 바라본 나는 실망했다.

“이걸 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

방금 내가 본 탑은 집을 짓다 남은 막돌을 아무렇게나 쌓아둔 모양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나중에 보자는 심정으로 일단 쌓아 올려놓은 미완의 탑 같기도 했다. 미술쯤이나 알고 미학 서적 한 줄쯤이라도 읽은 이라면 이걸 탑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내 앞에 서 있는 석탑은 그 어떤 구도나, 격식이나 미학을 떨쳐버린 벌거숭이 탑이었다.

 

 

 

근데 먼 산등성이를 내다보다가, 숲을 울리는 새소리 한 소절 듣다가 다시 보면 그게 아니었다. 이 벌거숭이 탑이 그 어느 형식미를 갖춘 탑보다 사람의 마음을 솔깃하게 끌었다. 볼수록 마음을 편하게 했다.

이걸 탑이라고 해야 하나! 하던 마음이 금세 바로 이게 탑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그 동안에 내가 알던 탑에 대한 개념이 내 안에서 좌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상원사 영산전 석탑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석탑은 내게 ‘좀 안다는 개념을 벗어던지라’는 화두를 건네주는 것 같았다.

우리 셋은 그 때, 그 탑앞에 쪼그리고 앉아 봄볕에 등이 따갑도록 탑신에 새겨진 불상들을 들여다보았다. 법당에 계시던 삼존불께서도 봄볕을 즐기러 영산전 마당에 나와 난데없이 찾아온 우리와 이야기하고 싶어하시는 듯 했다.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며 이우는 가을빛을 따라 상원사에 올랐다. 그리고 자연히 문수전보다 먼저 영산전으로 향하는 내 발길을 보았다.

영산전은 화마를 피한 오대산 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라 한다.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 맛배지붕 건축물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이름 없는 석탑은 여러 차례 무너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했다.

어디에도 탑에 대한 언급이 없는, 그야말로 형체도, 층수도, 번지도 알 수 없는 미아와 같은 탑이다. 하지만 깨어지고 금이 간 탑신에 새겨진 불상, 용, 구름, 연꽃무늬만은 정교하다. 바라볼수록 친숙한, 개울가에 나온 동네 소녀들처럼 예쁘거나 귀엽거나 착하다.

 

 

 

여기 영산전에 들어설 때가 오전 11시 무렵. 석탑의 단촐한 그림자가 영산전을 향해 누워 있을 때다.

석탑을 한 바퀴 돌고난 뒤, 이쪽 추녀 그늘에 앉아 사람의 흔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석탑을 바라본다.

석탑이 내게 말한다. 이제는 세상이 지어놓은 관념과 형식을 훌훌 벗어보라고. 시간을 정해놓고 그 안에 갇혀 사느라 힘들었다면 그 시간조차 무너뜨려 보라고. 자꾸 내게 자유로워지라 한다. 소박한데서 세상을 찾으라 한다. 황병산 너머의 하늘처럼 티 없이 맑아지라 한다.

한참 동안 석탑 너머의 황병산 능선과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가 일어선다. 가을이 자꾸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