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잘 나가던 것들
권영상
한 때 잘 나가던 그를 만난 곳은 그가 누리던 영화와 달리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들른 소박한 민속박물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그 옛날의 그답지 않게 초라했다. 희미한 조명 아래 약간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그 착잡한 공간에서 기억의 저편으로 소멸하고 말 것만 같았다.
내가 그를 만난 건 초등학교 시절이다. 그때 그는 번쩍였고, 경이로웠고, 그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우리는 저녁 숟가락을 빼면 그를 만나기 위해 숙제도 팽개치고 집을 뛰쳐나갔다. 그는 우리 옆집 안방에 모셔진 흑백 텔레비전이었다. 빈곤하던 마을에 찾아온 그네의 그것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과 추앙을 한 몸에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너남없이 저녁이면 그네 집 흑백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그 희한한 문명에 놀라워했다.
그 덕분에 그네 집도 자연 잘 나가는 집이 되었다. 잘 나가던 집이란 이제 쌀독에 쌀이 그득찬 집이 아니었다. 맨날 논밭에 나가 고단하도록 일만하는 것이 미덕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슬렁슬렁 텔레비전도 보고, 거기 나오는 극중인물 이야기도 하고, 그들의 모션을 따라할 줄 아는 사람이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뿐인가 그는 세계 헤비급 핵주먹 리스턴과 클레이의 권투중계도 보여주었고, 달나라에 올라가는 우주선도 보여주면서 차츰 집안의 부유함을 재는 가정환경조사서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잘 나갔다.
한 때 잘 나가던 것들이 거기 또 있었다. 이른바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사상대전집 그리고 분량을 자랑하는 대국어사전이다. 집집마다 갖추게 된 20권 50권짜리 전집과 두툼한 국어대사전이 그들이다. 그들은 읽히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럴싸한 서양가구들처럼 집집마다 거실 서가에 꽂혔다. 그 무렵 사람들은 우리나라 소설가들보다 스탕달이며 스타인벡, 서머셋 모음이나 니체,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를 더 사랑했다. 어쩌면 세계문학대전집조차 가정환경조사서에 등극할 뻔 할만큼 한 때 위력을 발휘했다.
나는 박물관의 유물들을 살펴나갔다. 수백 년간 잘 나가던 운송 기구 지게가 있다. 타자기가 있고, 삐삐며 수동전화기, 필름용 카메라, 레코드판, 비디오 테이프, 베틀, 등속이 그 희끄무레한 조명 아래 잠들어 있었다. 그들 모두 우리 문화계를 지배하던 것들이지만 지금은 초라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창회에서 보낸 부음 문자가 왔다. 한 때 승승장구하던 친구였는데 그도 벌써 생을 마쳤다. 다들 부러워했지만 그의 한 때라는 것도 아침 이슬처럼 너무나 짧았다. 원하지 않겠지만 그도 머지않아 민속박물관에 잠들고 있는, 한 때 부러움을 사던 물건들처럼 우리들의 아득한 기억 속에서 켜켜이 먼지를 쓰게 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그가 나일지라도 한 때가 지나면 다들 기억의 박물관으로 떠밀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짧은 한 때를 외면하고 마치 영원히 잘 나갈 것처럼 피로하게 산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민속박물관쯤은 들러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먼 훗날의 먼지 묻은 나의 모습을 만나게 될 테니까. 거기 내 모습에 남은 흔적이 가급적 소박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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