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가을날 꽃씨 받기

권영상 2015. 10. 6. 22:44

 

가을날 꽃씨 받기

권영상

 

 

 

 

 

가을이다. 하늘이 한정 없이 파랗고, 햇살이 빛난다. 오늘 같이 고요한 오후, 가을햇살이 흔들림 없이 마당으로 쏟아진다. 점심을 지어먹고 마당에 볕을 맞으러 나간다. 이런 좋은 날, 방안에 틀어박혀 뒹구는 건 재미없다.

 

 

마침 가을 볕 아래에서 내가 할일이 떠올랐다. 꽃씨를 받는 일이다. 세속을 살며 무례하게 사용한 내 손의 죄업을 꽃씨를 받는 일로 씻어주고 싶다. 마당에 채송화가 있다. 내가 함부로 손을 쓰며 살 때 채송화는 제 손으로 고운 빛깔의 옷을 지어 입었다. 한 포기는 이쪽 목화밭에 있고, 또 한 포기는 저쪽 쪽파 이랑에 있다. 어쩌다 거름기 있는 밭에 머무는지라 포기가 차고 꽃이 흐벅하게 핀다. 다만 씨앗 받을 시기를 놓칠까봐 익은 씨앗부터 따기로 했다.

 

 

 

낮은 자리에서

채송화가

저토록 곱게 피는 까닭은

 

 

누군가의 발길을

피하기 위해서다.

 

 

 

채송화에서 얻은 졸시다.

접시를 들고 나가 자연이 내린 채송화 씨앗을 선물처럼 받는다. 씨앗주머니를 꼭 눌러 부빌 때마다 겨자씨보다 작고, 까만 생명들이 오소소 쏟아진다. 하얀 접시에 받아들고 햇빛에 보려니 반짝인다. 요렇게 작은 씨앗 속에 그처럼 고운 꽃 모양과 꽃빛과 꽃의 크기와 꽃향기가 입력되어 있다. 꽃씨는 그런 정보를 모두 기억해놓았다가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 다시 그 기억의 회로를 열어 채송화를 피워낸다. 그 꽃이 왜 그토록 고울까. 태생이 키가 작아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시선을 빼앗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채송화 씨앗을 받으며 생각난 것이 백일홍이다. 백일홍이 사는 자리는 내 방 창문 밖이다. 모둠으로 서른 포기는 심었지 싶다. 그것들이 잘 자라 내 방 창문 높이까지 키가 컸다. 6월에 피기 시작하여 내리 넉 달을 쉬지 않고 피었다. 그 노고가 눈물겹다.

 

 

 

무엇보다 꽃잎이 두툼하고, 꽃빛이 마흔을 넘긴 여인의 몸처럼 깊다. 빨강 노랑, 분홍꽃이 번갈아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한 동안 이 동네 벌이며 나비들이 분주했다. 햇빛이 불타던 여름에는 박각시들이 날아와 창밖에서 내내 살았다. 그는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지 꽃 위에 앉는 법이 없다. 빠른 날갯짓으로 정지비행을 하며 대롱이 긴 부리로 꽃술의 꿀을 빤다.

꽃 진지 오래된 마른 꽃대에서 꽃씨를 받았다. 백일홍 꽃씨는 마른 꽃술 밑에 납작한 씨앗들이 숨어 있다. 지난해 백일홍 씨앗 발아에 실패한 이유는 마른 꽃술 밑에 숨은 씨앗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맨드라미 씨앗을 받았다. 지지난해 우리 아파트 마당에서 받아온 키가 작은 꽃맨드라미다. 어저께 충북 괴산 목도의 어느 민물고기매운탕을 먹다가 그 집 마당에 핀 키가 크고 꽃이 마치 활짝 편 부챗살처럼 붉고 실한 맨드라미 씨앗을 받아오긴 했다. 그렇긴 하지만 꽃맨드라미의 종자를 저장해 두고 싶다.

 

 

 

도라지꽃 씨앗을 받았다. 꽃을 보는 일로는 도라지를 빼놓을 수 없다. 도라지 뿌리도 뿌리지만 꽃이 좋다. 2년 전에 키운 도라지를 지난해에 뽑아 널직이 모종을 했는데 줄기가 실하게 자랐다. 그런 만큼 장마가 질 때 빗속에서 피는 도라지꽃을 내다보며 지루한 계절을 산뜻하게 넘겼다. 백도라지 청도라지 표를 해놓는다 하면서도 못했다. 찻술로 네댓 술은 될 만큼 씨앗을 받았다.

 

 

 

집 울타리며 감자밭 둘레에, 또는 마당에, 따로 만든 꽃밭에 넉넉히 심은 것이 프렌치 메리골드다. 심기도 많이 심었고, 피기도 오래 오래 지치지 않고 피어주었다. 올해는 딸아이 생일에 꽃을 사지 않고 이 허브꽃을 잘라다 썼다. 누님의 칠순 생신에도 한 아름 꺾어 안겨드렸다. 꽃이 오래 가지만 혹 시들면 잎을 대야 물에 담그어 치대면 허브향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손수건이나 양말을 그 물에 담갔다 말리면 향이 오래 간다.

 

 

 

올해 내가 사는 이 안성집을 빛내준 꽃이라면 이들 외에 첫봄을 연 하얀 무꽃과 파꽃이 있다. 여름날의 노란 쑥갓꽃, 파란 치커리꽃, 배롱나무꽃, 달리아와 나팔꽃, 봉숭아와 지금 순무밭 둘레에 가득 피고 있는 코스모스가 있다.

이들은 나와 함께 살면서 내 시 속에 들어오기도 하고, 산문에 들어와 글을 윤택하게 하는 일을 자청한다.

 

 

 

  나팔꽃이

  줄을 타고 처마 끝까지 올라가

  낮달에 매달리려고

손을 뻗쳐 올린다.

 

 

저것 좀 보아.

낮달이

그 손을 잡아주려고

기우뚱, 한다.

 

 

나의 졸시 ‘나팔꽃’이다.

데크에 자리를 깔고 꽃씨앗을 말린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내가 이들을 마치 귀한 손님처럼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이들이 계절을 설명해주는 해설자이면서, 내 손의 죄업을 씻어주는 종교이면서, 나를 흥분시키는 내 여인들이기 때문이다.

가을 날, 꽃씨 받는 일로도 마음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