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비행
권영상
동네 산을 한 바퀴 돌아오기 위해 남부순환로를 건널 때다.
차들이 평소보다 부쩍 많다.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날이 낀 징검다리 연휴 탓이다. 서초인터체인지를 향하는 걸 보면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대열이다.
연휴가 무려 5일이다. 초등학교도 10일간 단기방학이다. 가족이 함께 여행하기에 딱 좋은 시즌이다. 비록 고속도로가 정체된다고 해도 여행하는 일이라면 힘들게 없다. 목표가 있는 이상 그게 다 설렘이고 기쁨이다.
오랜 직장 생활에서 물러나 늘 연휴처럼 살면서도 괜히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대열을 보면 부럽다.
나는 그들과 달리 기껏 동네 산을 향했다.
사람들에겐 지금이 연휴지만 우면산 나무들에겐 연휴가 없다. 잎을 피우느라 바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어제 본 그 숲이 아니다. 하루 사이에 부피가 늘고 키가 한 뼘씩 더 자랐다. 5월의 숲은 햇빛을 충전하느라 요란하다. 질 좋고 깨끗한 햇빛 전원이 연결되는 자리마다 연둣빛 잎들이 서서히 초록으로 충전 된다. 나무들은 이때에 충전한 빛으로 올 한 해를 든든하게 살 수 있다. 깜깜한 밤에도 마음 안에 불을 켤 수 있고, 먼데 있는 나무들과 또는 별들과 통화할 수 있다. 숲속은 햇빛을 충전하기 위해 발돋움을 하는 나무들로 붐빈다.
참나무 언덕을 넘어섰다. 난데없이 나타난 한 떼의 은사시나무 솜털이 눈앞으로 흘러간다. 하얀 솜털 떼가 강물처럼 유유히 내 앞을 지나간다. 마치 물고기 떼가 유영하는 무리 사이로 걸어가는 기분이다. 숨을 쉬면 코로 입으로 솜털이 마구 달려들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는다. 그러면서도 이 낯선 풍경이 재미있다. 길섶이 온통 목화솜을 깔아놓은 것처럼 하얗다. 은사시나무 꽃씨 솜들이다. 이 산자락 아래쪽에 은사시나무들이 서 있는 모양이다.
코를 틀어막으며 산을 오르다 앞이 트인 언덕에서 쉬었다.
은사시나무 꽃씨 솜들이 여전히 내 앞을 날아가고 있다. 오늘 같이 바람이 잔잔한, 바람이 있는 듯 없는 듯 한 대기를 타고 은사시나무 꽃씨 솜들이 여행 중이다. 작은 바람에도 상승하도록 지어진 솜털 집에 까만 씨앗이 한두 점씩 찍혀있다. 그 작은 씨앗들은 가벼운 솜털집을 타고 지금 여행 중에 있다. 사람들에겐 이들이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며 불편해 할 테지만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꽃씨 솜들의 유영은 아름다운 비행이다.
사람이 아닌, 그들 은사시 편에서 본다면 그건 분명 아름답다. 징검다리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에겐 목표 지점이 있다. 그러나 은사시 솜털에게 목표지점이 없다. 있다면 터전을 잡고 살 곳이 어디든 다 좋다는 것이 사람과 다르다.
먼 곳을 비행하기에 오늘 날씨는 딱 좋다. 대기가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져 있다. 어제까지 긴팔 티셔츠를 입었던 나도 오늘은 반팔을 입고 나왔는데 숨쉬기가 버겁다. 대기가 부풀어 있다. 솜털들은 그 가볍고 부푼 바람을 타고 한결 같은 높이로 잔잔한 선율처럼 날아간다. 한 방향을 향해 꾸준히 날아가는 수평 이동이다.
이 솜털 안에 든 작은 씨앗들은 지금 들뜨고 설레겠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영토를 꿈꾸며 날아간다. 자신들의 낙하지점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이 내려선 자리에서 저들의 영토를 만들 의지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비행은 아름답다. 세상의 모든 생명에겐 의지가 있다. 생존과 번식의 의지.
내려오는 길에 공무원 교육원 쪽 건너편 산에서 뻐꾸기가 운다. 물레새 소리도 들리고 리기다소나무 위에서 쇠찌르레기가 나를 내려다보며 운다. 이들 모두 우리나라의 봄을 찾아 먼 길을 비행해 온 여름철새들이다.
그들 역시 풍향과 대기의 상태를 곰곰이 판별해 가던 어느 날, 자신들이 살던 터를 훌쩍 날아올랐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먼 길을 대기를 타고 날아왔을 것이다. 그들의 비행 뒤엔 생존과 번식의 의지가 있다.
허공은 비어있는 듯하지만 아니다. 그곳은 생명이 이동하는 공간임을 이 봄에 안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영상 동시집 출간 소개 (0) | 2015.05.08 |
---|---|
상상력이 풍부한 나라 (0) | 2015.05.06 |
비오는 날의 모종하기 (0) | 2015.04.30 |
숨은솔밭 숨은솔의 상처 (0) | 2015.04.29 |
포기 세대의 아픔 (0) | 2015.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