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모종하기
권영상
문득 아침 잠에서 깨었습니다. 달콤한 대지의 속삭임이 나를 깨운 겁니다. 닫힌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도닥도닥 도닥대는 소리는 분명 대지의 속삭임입니다. 일어나 창문을 여니 뜻밖에도 봄비가 옵니다. 봄비가 마당을 밟으며 지나가는 소리였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우비를 입고 마당에 나갔지요. 아무 예고 없이 오는 봄비치고 많이 옵니다. 우비를 입었지만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세숫대야와 호미를 들고 텃밭 온상으로 갔습니다. 이 4월 마지막 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꽃모종입니다.
온상의 비닐을 걷어내고 해바라기 모종을 세숫대야 가득 떠 담았습니다. 꽃모종을 떠내는 나도 설레지만 이제 심어질 자리로 옮겨가는 꽃모종들은 또 얼마나 설레겠나요. 그 자리가 어디든 그 자리에 가 서면 그 자리는 꽃이 되겠지요. 꽃빛으로 물들거나 꽃향기에 젖어들겠지요. 나는 품에 아기를 껴안듯 해바라기 모종을 안고 나와 울타리를 빙 둘러가며 심었습니다. 호미 끝까지 아직 비가 배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심어 놓으면 이 비가 다 살려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있습니다.
올해엔 내 창문가에도 네 포기나 심었습니다. 창문을 열 때마다 해바라기 그 빛나는 얼굴과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많은 해바라기는 나와 대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특히 침묵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긴 여름 장마엔 제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우주의 낌새를 가끔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런 그를 잘 알기에 올해는 나와 가장 가까운 창가에 그를 두고 싶었습니다.
해바라기 모종을 다 하고는 다시 프렌치 마리골드 앞에 앉았습니다. 씨뿌리기에 실패한 바람에 모종이 어립니다. 지난해에 비하면 너무 어립니다. 어린 딸을 출가시키는 옛날 아버지들 마음이 이렇겠지요. 자꾸 망설여졌습니다. 망설이다 모판 앞에 앉은 채 눈을 감고 대지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습니다. 이 비 그치면 비는 또 언제쯤 내릴 것인지 그 말이 엿듣고 싶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그게 내 귀에 들릴 까닭이 있겠나요.
그런데 '적기를 놓치지 말자!' 문득 그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비를 놓치면 다시 좋은 비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내가 여기 이 안성에 내려와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나는 이때가 적기일 거라는 생각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다루듯 조심조심 프렌치 마리골드 모종을 세숫대야에 떠 담았습니다.
마리골드는 따로 마련해둔 꽃밭에 가득 심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못 생각한 꽃길을 만들었습니다. 마당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길을 내고 그 양편에 나란히 심었습니다. 너무 어려 좀 안 됐기는 하지만 곡식 모종과 달리 꽃모는 야생의 버릇이 있어 거름 있는 땅보다 척박한 땅을, 기온이 좀 낮다고 해도 노지에 내면 더 잘 큰다는 걸 작년에 경험했습니다.
나는 이 프렌치 마리골드의 일생을 잘 압니다. 생장력이 뛰어나고, 꽃피는 기간이 그 어떤 꽃보다 길고, 무엇보다 지치지 않고 핀다는 게 좋은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허브 향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강하고 깊습니다.
나는 바늘처럼 가는 마리골드를 한 땀 한 땀 바늘땀을 놓듯 촉촉히 젖어가는 대지에 공들여 꽂았습니다. 지난해 내가 내려올 때 나를 반겨주던 꽃이 마리골드입니다. 주인 없는 집을 지키다가 도시에 지친 나를 만나면 빈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듯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니 종족이 다른 식구나 다름 없습니다.
작년엔 꽃보다는 작물을 짓는데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러면서 얻은 게 있습니다. 농약을 쓰지 않고는 단 한 포기의 배추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마늘 하나를 심고, 파 한 개 심는데도 살균과 살충제를 써야했습니다.
"그러느니 사먹는게 낫지."
나의 노고를 막아보려고 아내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여기저기서 꽃씨를 받았습니다. 춘천역 광장 꽃밭에서 백일홍을 받았고, 초당 허균 생가 터에서 거베라와 우단동자를, 여기 안성 길 건넛집 담장에선 접시꽃을, 노란 분꽃 몇 톨은 이웃 초등학교 꽃밭에서, 봉숭아 씨앗은 추석 성묫길에서 받아두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싹을 잘 틔워주어서 이렇게 모종을 했습니다. 모종도 종합선물 세트처럼 이것저것 모둠으로 심는 것보다 단일 품종을 무덕무덕 심는 게 요즘 꽃 심기의 대세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마리골드는 마리골드끼리, 백일홍은 백일홍끼리 무더기 무더기 심었습니다.
4월비는 지치지 않고 내립니다. 빗방울이 무거운지 우산이 자꾸 쓰러지려 합니다. 나는 어깨와 볼태기로 우산을 그러잡으며 그 꽃모종을 다 했습니다. 작년에 콩과 들깨를 심었던 자리에 모두 꽃을 심었습니다. 콩은 파종 시기를 맞추기 힘들고, 들깨는 잎에 병이 잘 걸립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들의 강점이 있습니다. 심어만 놓으면 주변의 풀을 제압한다는 점입니다. 풀밭을 밭으로 만들기 전에 꼭 심어야할게 이 고마운 들깨와 콩입니다.
빈속에 시작한 모종하기가 점심때에나 끝났습니다.
점심을 먹고 이제 다 끝났다, 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또 있습니다. 5월 초에 모처럼 중국 윈난성 여강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오랜 직장생활 끝에 퇴직을 했습니다. 혹사당한 아내를 위해서도 한번 바깥나들이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신청을 해놓았습니다. 그 날짜를 생각하니 심어야할 모종이 있습니다.
차를 몰고 10분 거리에 있는 백암으로 나갔습니다. 비 오는 4월이라 모종가게 앞에 모종이 지천입니다. 고추 모종 24 포기를 샀습니다. 좀 이르다 싶은 토마토 모종도 8포기 샀습니다. 대추토마토도 4포기 샀습니다.
다음 언젠가 내려와 그들을 심기로 했지만 그 때를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마른 땅에 수돗물을 주고 심기보단 아무래도 대지를 충분히 적셔주는 이때가 적기다 싶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대로 고추와 토마토를 심었습니다.
비는 오지만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모종에 물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냥 두어도 될 일이지만 심어놓은 꽃모종들과 한번 눈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잘 크라고, 꽃 필 날을 꿈꾸라고, 너무 어린 모종을 내어 미안하다고 물을 주며 일일이 인사를 했습니다.
물을 다 주고 허리를 펴니, 벌써 사위가 어둑어둑합니다. 비 오는 적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를 온전히 모종에 바쳤습니다. 그 사이 후둑후둑 내리던 빗소리도 뜸합니다.
늦은 저녁을 지어먹고 마당에 나오니 구름사이로 달이 보입니다.
“아, 달이구나!”
때맞추어 비를 내려주신 하늘과 때맞추어 일을 마치도록 알맞은 시간을 주신 우주의 신비를 느낍니다. 하루 일을 딱 마친 이 시각에 우리는 서로 딱 맞게 만났습니다.
이제 5월이 오면 나는 오늘처럼 혼자 저 달을 보지 않고 오늘 모종한 꽃모며 푸성귀들과 함께 볼 것입니다. 그때는 저 달이 오늘밤보다는 필경 향기롭게 보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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