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권영상
오전 일을 비웠습니다. 온상에 꽃씨를 심을 생각입니다. 지난해 달력을 보니 4월 2일에 꽃씨 온상을 했네요. 초봄 기온이 20도를 오르내리니 마냥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꼭 날씨 탓만은 아니네요. 꽃씨를 넣고 싶은 마음이 자꾸 나를 재촉합니다.
우선 텃밭에 나가 삽으로 땅을 파고 흙덩이를 부수어 모판을 고르게 만들었습니다. 흙을 만져보니 땅은 씨앗 받아들인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손으로 흙속을 깊숙이 찔러도 보았습니다. 풋풋한 봄의 온기가 느껴집니다. 부드럽고 다정합니다.
지금 꽃씨를 심으면 4월 하순쯤 모종을 낼 수 있겠지요. 지난해엔 미처 꽃씨 준비를 못했습니다. 해바라기와 프렌치 마리골드 그 정도였습니다. 해바라기는 집 둘레에 빙 둘러가며 심었고, 프렌치 마리골드는 집 안마당과 창밖에 꽃밭을 하나 만들어 넉넉히 심었습니다. 근데 이 두 꽃이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효자노릇을 했습니다. 꽃도 꽃도 그렇게 많이 필 수 없고, 그렇게 오래도록 필 수 없습니다. 붉은 우단빛에 노란 테가 난 프렌치 마리골드는 꽃빛이 화려하고 깊었습니다. 특유의 허브향 때문에 꽃무더기에 머리를 들이밀면 박하를 먹은 듯 머리가 싸아하게 맑아졌지요. 꽃가지만도 한 아름씩 벌어 해질 무렵이면 꽃향기가 밀물처럼 마당에서 출렁거렸지요.
해바라기는 또 어땠나요. 해바라기는 생각이 많은 꽃입니다. 천성이 한 자리에 묵묵히 머물러 있기를 즐기는 꽃이라 그를 바라보면 자연 생각이 많아집니다. 비 올 때나 청명할 때나 그와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고 미더운 데가 생깁니다. 그는 또 일의 정당성을 은근히 일깨워주는 꽃이기도 합니다. 폭양 아래에 선 그를 보면 일 하는 것이 싫지않아집니다. 그는 폭양 속에서도 번쩍이는 꽃을 피우며 화려한 생명력을 과시했지요.
지난여름과 가을은 오로지 프렌치 마리골드와 해바라기의 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이 세상에 나와 사는 생명이라면 다 한 때가 있는 법이지요. 잘 나가던 한 때 말입니다. 뭇 사람들로부터 입을 타던 한 때 말입니다. 그 한 때야말로 생명의 절정이지요. 한 때는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세상에 한 때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짧은 인생 속에도 한 때는 있고, 혹독한 인생 속에도 자신만의 한 때는 다 있습니다. 한 때란 호사를 누리는 시기가 아니라 열매 맺는 아픔이 있는 한 때가 진정한 한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고통은 또 고통대로, 고독은 또 고독대로 그것도 다 한 때이거나 한 때로 가는 아픔일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꽃씨를 심는 까닭은 지난해의 꽃들이 보여준 그 한 때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인 거지요. 아니,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나의 한 때가 그리워 꽃씨를 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받아놓은 꽃씨를 심습니다. 프렌치 마리골드와 해바라기 씨앗은 물론 백일홍, 접시꽃, 봉숭아, 작약, 창포, 붓꽃을 심었습니다. 꽃 씨앗을 다 넣고 지난해에 쓴 비닐을 깨끗이 씻어 온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또 매일 이 꽃씨 온상을 들여다보며 꽃씨 순이 나오길 기다릴 겁니다.
손을 털고 일어서려니 그 옛날에 본 장만옥 양조위 주연의 ‘화양연화’가 떠오르네요. 그들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한 순간이 필름처럼 지나갑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그게 화양연화 아니었던가요. 내가 지금 뿌린 이 꽃씨들이 다가올 화양연화를 꿈꾸듯 내게 또 한 번 올지도 모를 빛나는 한 때를 꿈꾸어 봅니다. 과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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