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가 돌아왔다
권영상
볕이 따갑다. 하던 일을 놓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접어 들고 나왔다. 데크에 세워둔 빨래 건조대에 간밤에 덮고 잔 이불을 널었다. 한 사나흘 서울에 가 있다가 안성에 내려올 때면 으레 이부자리부터 내다 말린다. 근데 오늘은 아니다. 유난히 볕이 깨끗하고 아까워 엊그제 내다 넌 이불을 다시 들고 나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른 볕에 이불을 내다너는 일이 좋다. 가득 쏟아지는 마당 볕에 이불을 내다걸면 마음이 부유해지는 느낌이다.
이불을 널고 아까 내려놓았던 호미를 다시 들었다. 비에 무너진 고추이랑을 세워주었다. 고물고물 올라온 파씨 사이로 돋은 풀을 뽑고, 물을 흠뻑 주었다. 아직도 물 줄 일이 또 있다. 엊그제 백암 장터에서 고구마 순을 살 때 함께 사온 게 있다. 참외 모종 세 개와 수박 하나이다. 그걸 괜히 사 보고 싶어 샀다. 사람이 얼씬거리지 않는 수돗가 근처에다 심었다. 그들 앞에 다가가 앉으면 벌써 노랗게 익은 참외가 그려지고 덩그런 수박덩이가 그려진다. 굉장히 시각적인 것들이다. 고구마 순을 산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찔러넣지 못하고 이들을 집어든 것도 어쩌면 그 시각성이 강한 유혹 때문일 테다. 물을 또 흠뻑 주고는 누가 밟을까봐 돌멩이로 표를 해놓고 일어섰다.
찬물에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건조대 이불에 얼굴을 대어본다. 보들보들한 게 따스하다. 더운 봄인데도 이불의 따스한 느낌이 싫지 않다. 꽉 막혔던 마음의 어두운 한 구석이 콸썩 무너지듯이 풀어져내린다. 마음이 평평해지고 넉넉해진다. 이불솜 안에 햇볕을 가득 저금해놓은 것처럼 부유해진다. 무엇보다 밤에 햇볕을 잔뜩 머금은 이불을 몸에 덮고잔다는 기쁨이 있다. 거추장스런 잠옷 다 벗고 하나 남은 속옷만 걸치고 이불을 덮으면 마치 우주와 내 몸이 직접 만나는 기분이 든다.
손으로 마른 이불을 꼭 쥐어본다. 이불 속에 함뿍 들어가 숨은 햇볕이 내 손에 한 움큼 쥐어진다. 손이 보송보송해진다. 마치 황금을 한 덩이 쥐었다 놓은 것처럼 노란 5월 햇빛 물이 든다. 이참에 이불 밑에 까는 매트까지 들고 나왔다. 매트를 데크 난간에 엉거주춤히 세우려는데 어디서 듣던 소리가 난다.
제비다. 쳐다보니 제비다. 제비들이 마당 위를 날며 그야말로 지지배뱃 지지배뱃 지저귄다. 나는 매트를 놓고 이 뜻밖의 광경에 놀라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젊은 사내아이들처럼 목소리가 크고 기운차다. 네 마리다. 그들은 내 머리 위의 하늘을 급선회하며 나를 부르는 듯 하다.
“여, 이거 오랜만이구나!”
나도 모르게 옛 친구를 반기듯 인사를 해 주었다.
정말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제비인가. 반갑다면 친구보다 더 반가운 제비다. 언젠가 제주 애월리 바닷가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 그 후 경주 양동마을에서 한번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내 머리속에는 이제 우리 땅엔 제비가 없는 걸로 돼 있었다.
그랬는데, 제비라니! 반갑다 못해 신기하다. 마치 3,40년 전의, 부모님 다 살아계신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울밑에 아버지가 심어놓으신 호박씨가 나오고, 마당 볍씨 독의 볍씨가 통통하게 불을 무렵이면 제비가 돌아왔다. 울담가 늙은 오동나무와 집처마에 길게 매어놓은 빨랫줄에 제비는 날아와 요란스러이 울었다.
지지뱃배 지지뱃배.......
그것은 삼동을 무사히 견뎌낸 농가 사람들을 향한 축복의 연가였다. 어쩌면 다시 봄을 맞은 부활의 노래이기도 했다. 그러던 때에 어머니는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버지의 춘추복 두루마기에 동정을 다셨고, 아버지는 도랑둑에 새로난 풀을 베어 암소에게 신선한 풀맛을 보이셨다.
지나간 과거의 기억처럼 사라진 제비가 홀연히 돌아왔다. 보아도 보아도 싫지 않다. 그 재재바른 목청이며 날렵한 몸짓이며, 그리고 이 땅의 흥부들과 가난을 함께한 세월들 …….
제비는 민중들의 친근한 새다. 배고픈 민중들에게 ‘박씨’라는 꿈을 심어주며 위로해온 새다.
제비가 이렇게 반가운 건 그 때문이다. 새 봄이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제비를 기다려온 빈한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분들은 삼동이 길고 참담할 때면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제비를 기다렸다. 그런 긴 기다림 끝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제비는 그 얼마나 반갑고 반가운 손님이었을까.
그런데 우리들은 오랫동안 그 제비를 잃어버리고 살았다. 아무리 힘든 겨울이어도 견뎌내면 이듬해 봄에 제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지금의 궁핍보다 더 나은 배부름의 봄이 올 거라는 ‘박씨의 꿈’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다림과 기대와 꿈조차 다 사라진 시대에 와 갈 길을 몰라 서성이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제비가 내려앉을 빨랫줄이 없다.
내년 봄을 위해서라도 빨랫줄을 맬 든든한 나무를 하나 키워야겠다. 그래서는 그 끝을 처마에 묶어놓고 이불도 내다널고, 제비도 날아와 앉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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