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꽃잎들의 가혹한 희생
권영상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 온다. 4월내내 서울엔 비가 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우두커니 비를 내다본다. 무성할 대로 무성해진 느티나무며 벚나무들이 이 비에 삼단같은 초록빛을 늘어뜨린다. 그들을 바라보던 내 눈이 놀이터 쪽 모과나무 아래에 가 멈추었다. 엊그제까지 연분홍으로 피어있던 모과꽃이 밤새 내린 비에 다 떨어졌다. 하얗다. 나는 나무의 수형대로 둥글게 떨어진 모과꽃잎들을 망연히 보았다. 4월의 나무들이 즐기고 있는 이 비의 축복도 그들에겐 축복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꽃은 곱다. 어디에서 피건 꽃은 다 곱다. 나뭇가지에 피어있을 때도 곱지만 땅 위에 떨어져 누웠을 때도 곱다. 꽃은 그렇게 다 예쁘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열 손가락을 깨물어 열 손가락이 다 아프듯 이 세상에 피어난 꽃은 떨어져도 하물며 다 예쁘다.
떨어진 꽃이 아름다운 건 열매 맺기 위해 그 찬란한 시절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가장 아름다운 때를 위하여 떨어질 줄 아는 꽃의 이면엔 열매를 맺으려는 본능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나무에 핀 꽃이라고 다 열매 맺는 건 아니다. 그 중에는 결실의 꿈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떨어지는 슬픈 꽃도 많다. 낙화가 서럽고도 비극적인 건, 그런 꽃들의 아픈 희생이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게 이름 있는 별들 때문이 아니라 보일 듯 말듯 이름 없이 떠 있는 외로운 별들 때문인 것처럼. 저 꽃잎들 중에서도 열매를 꿈꾸어보지 못 한 채 지고 말았을 꽃잎을 생각한다.
나는 우정 우산을 쓰고 낙화를 보러 마당으로 내려갔다. 4월비에 아파트 마당은 벌써 푸른 숲의 향연을 구가하고 있다. 나무라는 나무들은 일찍 찾아온 봄 잔치에 꽃을 피우고 떨어뜨린 지 이미 오래 됐다. 이제는 결실을 위해 잎을 키우고 가지를 벋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남들 다 달려나간 뒷자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꽃을 떨어뜨리고 있다. 남들은 5월을 향해 꿈을 키우고, 남들은 그 너머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는데 4월비의 무게를 못 이기고 차가운 땅바닥에 젖은 꽃을 하얗게 떨어뜨려 놓았다.
나는 그 많은 꽃잎 중에서 한 잎을 집어 들었다. 눈물 같은 비에 젖어 꽃잎이 차갑다. 이 꽃잎도 지금은 비에 젖었지만 처음 꽃망울을 터트릴 때엔 꿈에 부풀었을 테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꽃피어나기 위해 달떴을 것이다. 높고 고귀한 이념으로 세상을 향기롭게 만들어보겠다는 기대로 부풀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꿈을 펼치기 위해 길고 어두운 밤을 인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꽃잎들은 그런 꿈을 접고 땅에 떨어졌다. 그 여리디 여린 몸으로 모순과 부조리와 욕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감싸안기 위해 누구도 엄두내지 못하는 지상 위에 쿵, 떨어졌다. 그때 이 모순투성이의 세상은 배의 갑판처럼 기우뚱했고, 바다는 출렁, 하며 크게 요동쳤다. 하필이면 그 순정한 꽃잎들이 어른들을 대신해 가혹한 희생을 치루었다. ‘엄마, 나 어떡해.’ 하는 비명을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아, 꽃은 졌다.
비에 젖어 울고있는 꽃잎에 경건히 입을 맞춘다. 그리고 ‘안녕히!’ 속으로 울며 작별을 한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만드는 나의 천국 (0) | 2014.05.02 |
---|---|
조회 1만회, 다랑이논 그림 (0) | 2014.05.01 |
봄밤의 그윽한 소쩍새 울음 (0) | 2014.04.24 |
어른인 나는 그게 부끄럽다 (0) | 2014.04.22 |
칠곡 계모 사건에 휘둘리는 호들갑 (0) | 2014.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