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 어떻게 출발해야 하나
권영상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다. 잠깐만요! 하며 젊은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뛰어 들어왔다. 길에서 만나 함께 오는 모양이다.
“느네 반 애들 좋니?”
엄마가 숨을 고르면서 딸아이에게 물었다.
“몰라. 요기 명희, 걔 우리 반 왔어.”
여자아이는 3학년쯤 되어 보인다.
“걔 공부 잘 하니?”
엄마가 그것부터 물었다. 딸아이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과 헤어져 나는 4층에서 내렸다.
새 학년 새 학기다.
3월이면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낯선 얼굴들과 만나는 시기이다. 아무리 붙임성이 좋은 아이들이어도 정든 친구와 헤어지고, 낯모르는 얼굴과 만난다는 일은 긴장된다. 새로 만난 서른 명의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인지 서먹서먹하다. 그들은 마치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선물처럼 선뜻 풀어보기가 망설여진다.
다들 나보다 공부 잘하면 어쩌지, 마음에 드는 애들이 없으면 어쩌지, 선생님은 어떤 분이지, 싫어하는 애와 같은 반에서 만나면 어쩌지…….
긴장하기는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엄마처럼 공부 잘 하는 애들이 많으면 어쩌지, 그것부터 걱정이다. 우리 애가 선생님에게 관심 못 받으면 어쩌지, 우리 애 외톨이 되면 어쩌지, 하고. 사실 걱정 안 되는 곳이 어디 있을까. 아이들은 이런 걱정을 크게 오래 하지 않는다. 서로 부딪히면서 자기의 포지션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인 엄마는 다르다. 그 포지션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공부 좀 한다는 명희네에 전화를 해 명희가 다니는 학원을 알아본다. 명희는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잠자는지, 명희가 공부하는 학습지는 뭐고, 명희가 읽는 책은 뭐고, 명희 꿈은 무언지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내 아이에게 ‘명희 따라 하기’를 시킨다. 그 순간부터 자신이 낳은 자식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명희가 들어온다. 이때부터 엄마는 가혹해진다. 내 앞에 보이는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고 명희니까.
그런데 오랫동안 교직에 있어본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마치 남의 자식 대하듯 학원으로 내몬다고 학업이 향상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뜻이 무시된 채 학원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은 금방 공부에 싫증을 낸다. 한번 공부에 싫증낸 마음을 되돌리기란 산을 옮겨놓는 것만큼 어렵다. 되돌리려하면 할수록 반항심만 커져서 아이를 그릇되게 만들기 십상이다. 공부 잘 하는 이웃아이를 보면 어떤 엄마든 열 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한다는 건 다른 아이들보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잘 고분고분 한다는 뜻 외에 실은 크게 부러워할 게 못 된다.
그러느니 자녀가 좋아하는 것, 책읽기면 책읽기, 취미면 취미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일이 훨씬 낫다. 어느 한 가지를 터득해본 아이라면 좀 늦게 공부를 시작해도 크게 늦지 않다. 늦게 배운 공부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그냥 넘어간 공부마저 스스로 알아서 한다. 그런 아이들은 공부와는 다른 분야를 터득하고 왔기에 학습 성취에 대한 뒷심이 남다르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매우 긍정적이다. 남을 따라 하기보다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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