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젠틀맨, 알랑가몰라 왜 미끈해야하는건지

권영상 2014. 3. 7. 18:05

젠틀맨, 알랑가몰라 왜 미끈해야하는건지

권영상

 

 

 

 

 

 

 

 

싸이의 비디오를 볼 때면 늘 나는 나의 상상력을 한탄한다. 나는 왜 젊은 그들처럼 기발하지 못할까. 나는 왜 그들처럼 발랄하지 못할까. 나는 왜 자꾸 나이값을 하려는 걸까. 나는 왜 지난 날의 답답한 형식 안에서 편안히 살려고 할까. 나는 왜 싸이를 들으면 ‘이것도 노래야?’ 그런 말을 할까말까 할까. 나는 누군가 상식을 뛰어넘은 제스처 취할 때면 나도 모르게 ‘정신 나갔어!’ 그렇게 소리치려 할까. 나는 왜 젊은 세대들의 발랄함을 보면 ‘요새 애들 버릇없어’ 그런 군소리를 하려고 할까.

 


뮤직비디오가 열리자, 언덕 너머에서 간장종지 선글라스를 낀 젠틀맨이 올라온다. 잔뜩 겉멋에 사로잡힌 젠틀맨이 길가에 세워둔 ‘주차금지’를 냅다 걷어찬다. ‘주차금지’ 그건 누군가가 세워놓은 권력이다. 젠틀맨은 제 내면의 나쁜 손으로 마네킹의 볼록한 가슴을 만진다. 마치 단축키를 몰라 키보드를 마구마구 눌러대듯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댄다. 한손 가득 구린 방귀를 움켜 여자 친구의 입안에 밀어넣는 젠틀맨은 쾌하다. 재미있다.

 

그래서 좋다. 신호대가 출발과 정지신호 기능만 하는게 아니라 섹스샵의 폴대가 될 수 있어 젠틀맨은 좋다. 예쁘고 잘 생긴 여자의 허리 다리 종아리 좀 보면 어때! 가래떡으로 목도리 좀 하면 어떻고, 그걸로 멋 좀 내면 뭐 어때! 젠틀맨들은 딱 싫어. 밥맛이야. 양복에 넥타이, 그게 최선의 패션인양 입고 점잖빼는 젠틀맨은 너무너무 싫어.

알랑가몰라. 사람들은 가끔 젠틀맨이 죽도록 싫을 때가 있다. 젠틀맨은 전통적 상위부류의 남성들이다. 그들은 사회를 짓누르고 업악하고 통제해온 가장 진부한 문화이며 권위다. 젠틀맨은 무너뜨려야할 낡고 고루한 타킷이다. 젠틀맨이 똥구멍 찢어진 바지를 입거나, 남대문 열린 바지를 입거나, 자켓 밑에 팬츠를 입거나, 칼힐을 신어준다면 넘넘 좋겠다. 골목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거나 하수구에 한번쯤 빠져준다면 더욱 좋겠다.

 

 



지금의 대중음악은 테크놀로지와 음악과 비디오가 결합되어 독자와 만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과거에 들어주기만 했던 청중이나 일상의 구조물조차 음악 속에 능동적으로 들어선다. 젠틀맨은 그런 다양한 음악적 환경들과 결합되어 있다.
젠틀맨이 더 재미있었으려면 소음의 첨가가 고려됐어야 한다. 길거리에서 날아드는 클랙션, 깡통 구르는 소리, ‘오징어가 왔십네다’나 텔레비전 잡음, 격발되는 방아쇠 소리.... 이런 소음의 첨가야말로 폭넓은 경험을 통해 더 다양하게 이 음악을 읽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소음이 첨가될 때 뮤직비디오는 더 일상과 가까운 쪽으로 다가가 공감력을 높일 수 있다.

 


I’m a mother father gentleman.
섹시하고 저속한 욕설, 그 내면에 숨어있는 젠틀맨에 대한 야유가 속시원하다. 우리는 장구한 시간 동안 젠틀맨의 허위과 과장과 권위에 끄달리며 살아왔다. 그 오래된 권위를 ‘젠틀맨’은 반어적 방식으로 야유한다. 그 점에서 ‘젠틀맨’은 음악의 기능 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차로신문 2013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