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권영상
“당신은 잠복을 타고 났어.”
잠을 잘 못 자는 아내는 가끔 나의 잠 습관을 부러워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좀 그런 느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자정을 넘기기 전에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잠에 들었다 하면 아침 6시에 눈을 뜹니다. 잠 하나만은 깊고 충분하게 잡니다.
그 말고도 아내가 ‘잠복을 타고났다’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꿈입니다. 나는 꿈이 없습니다. 꿈이 없다는 말이 옳은지, 꿈을 안 꾼다는 말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만 꿈 없는 잠을 잡니다. 혹 꿈을 꾼다면 일 년에 한두 번 꿈맛을 볼까, 그저 그 정도입니다.
“별 꿈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꿈마저 없는 거지뭐.”
가끔 아내에게 그런 농담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꿈이 많은 아내를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꿈이라곤 안 꾸는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이 있을 텐데, 간밤 꿈은 거두절미하고 딱 한 컷짜리였습니다. 그 한 컷도 배경이 없는 인물만 등장했는데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홀연 꿈에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아흔 일곱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꿈에 본 어머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예순쯤의 모습이었습니다. 흰 저고리에 감물빛 치마를 입으셨습니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 속 여인 같은 전신상을 한 모습입니다. 생전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반듯하고 너른 이마와 곱게 빗은 비녀머리, 상크렇게 나온 두 귀와 똑 바른 눈매, 그리고 오롯이 다무신 입. 정말 그림 속의 정물 같이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오셔서는 따뜻한 물이라도 한 컵 잡수시지 못하고 금방 가셨습니다.
그러느라 이것저것 여쭈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간 안녕히 잘 계셨는지, 이불은 잘 덮고 주무시는지, 날 좋을 때 <박부인뎐>은 요즘도 읽고 계시는지 그런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이 퍼뜩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꿈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도 금방 떠나가셨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쯤입니다. 다시 눈을 붙이려해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꿈이라곤 안 꾸는 내가 어머니를 이렇게 보았습니다.
어머니 생각에 거실로 나왔습니다. 건너편 아파트에 아직도 불 켜진 집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는 왜 오셨을까?
그집 또렷한 불빛을 보며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 생각을 너무 안 한듯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잊지 말라고 나를 한번 찾아오신 게 아닌가,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식 노릇을 너무 못한 듯합니다. 어머니가 아흔 일곱에 돌아가셨으니, 사실 만큼 사시고 갔다고 마음을 놓은 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연세를 사셨다고 해도 막내인 내가 모신 날은 통틀어 한 달도 못 됩니다. 그러고도 나는 무슨 염치로 그런 불측한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부끄럽습니다.
지난 추석에도 부모님을 못 찾아뵈었고, 올 설에도 형님을 뵙느라 고향에 못 갔으니 어머니가 서운하셨던 모양입니다.
고향으로부터 먼 이 서울에 올라와 이쪽과는 다른 세상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자식을 낳고 기르고 나이를 먹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의 이치이건만 그런 이치가 오히려 사람을 허전하게 합니다.
다시 안방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식탁 앞에 앉으니 찰밥에 미역국입니다.
“오늘 누구 생일인가?”
그러며 수저를 들었습니다.
“생일은 누구 생일. 당신 생일입니다.”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 마디 합니다.
몇 숟갈 밥을 먹는데, 신림동에 사시는 누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아침에 미역국도 잘 먹고.”
어렸을 때 병석에 누우신 어머니 대신 나를 돌보아주던 누님입니다. 그런 누님이니 내 생일을 모를 리 없지요.
통화를 마치고, 다시 식탁의자에 앉으려니 문득 간밤 꿈 생각이 났습니다.
‘아, 오늘이 내 생일인 줄 알고 어머니가 오셨구나.’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정말 어머니를 모릅니다. 어머니 생각을 안 하는 나를 탓하러 오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막내아들의 생일 날짜를 잊지 않고 계셨던 겁니다.
몇 술 밥을 뜨다가 일어나 베란다 창가에 나가섭니다. 저쪽 아파트 모퉁이에 서 있는 모과나무를 보았습니다. 우듬지 위로 뭔가가 슬며시 사라집니다. 바람에 날아오르는 낙엽인가 하고 보았지만 창밖은 조용합니다. 혹시 어머니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어머이!’
속으로 어머니를 불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울컥 눈물이 솟습니다.
“조선 인조대왕 연간에 이득춘이 있어 벼슬이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는데,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니 이름이 시백이라.”
어렸을 적, 어머니는 나를 어머니 무릎에 뉘이고 이 <박부인뎐>을 즐겨 읽어주셨지요. 비가 길어져 바깥일을 못하시거나, 긴 겨울밤 아랫목에서 읽어주시곤 했지요. 그 조용조용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방에 들어와 달력을 보니 어머니 기일이 멀지 않았습니다.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도 뵙고, 아버지도 찾아 뵈어야겠습니다.
오늘 어머니가 오셨다 가셨으니 어머니는 내년에나 다시 내 꿈속에 찾아 오시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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