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비밀이 사라진 세상

권영상 2013. 9. 29. 14:35

비밀이 사라진 세상

권영상

 

 

 

 

 

 

오래된 책을 집어들자, 그 속에서 엽서 한 장이 떨어졌다. 엽서엔 스크랩 한 신문기사가 붙어있다. ‘원이 아버지에게’라는 기사다. 기사가 난 날짜도 없다.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였지요.”로 시작되는 한글 편지다. 31살에 요절한 남편을 앞에 놓고 눈물로 적어내려간 미망인의 글이다. 편지 쓴 해는 1586년, 지금부터 약 420년 전이다.

안동시가 1988년 정상동 산기슭에 택지개발을 하고 있을 때다. 이 편지는 그때 무덤을 이장하던 관속에서 발견되었는데 편지의 임자는 고성 이씨 이응태의 부인, 곧 원이 엄마다.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와 같은까요.......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 주세요.”

이런 내용도 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서로 아끼고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관에는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 한 컬레도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엽서에 오려 붙여놓은 걸 보면 이 편지에 나도 꽤 감동했던 모양이다.

근데 이 편지를 읽어볼수록 좀 묘한 데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같은 표현이다. 개방된 지금 시대에 읽어보아도 웬지 좀 낯뜨겁게 느껴진다. 그들의 사랑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분홍빛 냄새가 난다. "당신은 내 뱃속의 아이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 하면서” 먼저 떠났느냐고 서러워하기도 한다. 여성의 편지라 그런지 사랑의 감정을 육감적으로 이끌어내는 묘사력이 있다. 이 글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 아니고 땅속에 영영 묻히고 만다는 점에서 여인은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흔히 조선을 금욕과 절제의 시대라 한다. 감정의 억제를 미덕으로 삼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좀은 야한 글이 나왔을까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을 억압했던 조선은 16세기 이후다. 그 이전만 해도 조선시대 여성들의 의식속엔 고려 여인의 자유분방한 사고가 남아 있었다.

이 편지를 가만히 다시 읽어보면 외설스러운 고려가요의 한 구절을 슬쩍 보는 듯하다. 물론 고려 시절의 여인들의 노래는 대부분이 지금으로 말하면 불륜의 아픔이다. 성이 자유로웠던 그 시절에 불륜이란 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비해 이 조선 여인의 글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다. 다르다면 그게 다를 뿐이지 내밀한 사랑이야 크게 다를 일이 없겠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제사는 장자만 모시는 게 아니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모시거나 남녀를 구분하지도 않았다. 자식도 친자만이 아니고 외손자도 함께 키웠다. 


 

 

이 편지가 쓰여진 시기도 16세기다. 그 때를 이해하고 나면 이런 글이 나오는 데 대해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16세기가 아니었다 해도 사별한 임의 관속에 들어갈 편지에 그 어떤 애정사를 무슨 말로인들 못 적겠는가.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또 하나, 이 편지가 나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세상에 공개됐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 편지를 잊지 못하는 것은 절절한 사별의 아픔 때문일까. 그런 부분도 물론 있겠다. 그러나 땅속으로 들어간 이 편지의 내용이 땅에서 썩어지지 않고 숨김없이 고스란히 세상에 밝혀졌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한 놀라움, 또는 당혹감, 말할 수 없는 경악도 내면에 있을 것이다.

편지란 매우 사적인 형태의 글이다. 친구간에 주고받은 편지는 모르지만 부부간의 편지는 더욱 은밀할 수 있다. 그런데 꿈에도 공개될 줄 몰랐던 은밀한 편지가 무덤에서 살아나와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것이 420년 전의 일이든, 천 년 전의 일이든 밝혀지지 말아야할 것이 주인의 허락없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도 중국 어디선가 무덤에서 에로틱한 모습으로 누운 채 입맞춤 하는 두 남녀시신을 공개한 기사를 읽었다.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인간의 사랑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말해주려는 것일까. 죽은 자에 대한 배려도 살아있는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나무의 나이를 알겠다고 나무를 베어 나이테를 세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뭐든 홀랑 벗겨놓아야 성이 차 한다.

 

(교차로신문 2012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