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학습 강요가 내 아이의 분노를 키운다

권영상 2013. 9. 22. 12:20

 

 

학습 강요가 내 아이의 분노를 키운다

권영상

 

 

 

 

 

서울역에서 사당행 4호선 전철을 탔다. 한산했다. 그런데 전철이 숙대입구역을 막 출발할 때다.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빼고 비스듬히 앉은 여자가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아니, 너 지금 뭐하는데 엄마 전화 꼬박꼬박 받냐!”

여자 목소리가 내 귀를 꼭꼭 찔렀다.

사람들은 이 꼬챙이 같은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흘끔 여자를 봤다.

“원석이 바꿔봐!”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윽고 그 원석이가 전화를 받는 모양이다.

“형은 도대체 뭐하고 놀길래 엄마 전화나 꼬박꼬박 받고 있냐?”

여자가 성을 냈다.

“학원서 받아온 천자문, 엄마가 스무 번 쓰라 했지. 그거 하고 있냐?”

목소리는 작았지만 차가웠다.

형도 분명 과제를 받았을 텐데 과제는 안 하고 전화나 받는다는 게 여자는 괴로운 모양이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주지 않는 자식이 미운 거다.

 

 

 

 

“형 잘 지키라 했는데 너는 대체 뭐하고 있어! 천자문 다 쓰면 책꽂이에 있는 명작동화 아무거나 한권 꺼내 읽어. 알았어?”

여자가 탁, 소리가 나도록 휴대폰을 닫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승객들이 또 한 번 그 여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내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평소 큰아들의 행동이 여자는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쓴 끝에 동생 보고 형을 감시하도록 했나보다. 아니, 어쩌면 서로 감시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다리를 꼬고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한강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건너는 전철 바퀴소리에 그 여자의 통화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지우려 내가 애쓰고 있었다.

한강을 다 건넜을 때쯤 여자가 또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 이제 다 왔거든. 도착할 때까지 숙제 다 해 놔. 알았어!”

저쪽 목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여자가 휴대폰을 거세게 닫았다. 그 순간 명작동화 중에서 엄마가 시킨 대로 ‘아무거나’ 꺼내드는 불안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는 그 사이 천자문은 다 썼을까. 전화나 꼬박꼬박 받은 그의 형은 또 얼마나 안절부절하고 있을까.

어쩌면 엄마보다 한 수 위의 머리로 엄마를 속일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모르는 여자는 그런 방식으로 자식을 길들이는 일에 만족해 할 것이다.

형 동생 간의 우애나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같은 건 아예 안중에 없다. 엄마 없는 시간을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놀고 쓸 수 있도록 여유를 만들어줄 줄도 모른다. 오직 공부,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여자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숙제 한 것을 내놓으라고 다그칠 것이다. 아이들은 그때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숙제를 내놓을 것이고, 엄마는 만족감에 취해 자식을 더욱 조일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으로 변해갈 것이다. 가정이 이렇게 되는 데는 ‘다 널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나친 공부 강요가 있다.

 

 

중학생들의 왕따와 자살 사건이 연말연시를 얼룩지우고 있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에도 역시 사회에 팽배해 있는 성적지상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엄마를 살해한 구이동의 한 고등학생이나, 친구를 물고문한 대구의 중학생이 또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들 모두 겉보기에 평범한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이 평범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일방적인 학습강요로 내면에 무서운 분노를 키운다. 그 분노가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폭발할 때 거기에 물고문, 폭행, 괴롭힘과 같은 왕따가 생긴다.

요즘 아이들은 역사상 유례없이 공부에 시달리고 있다. 누가 이 아이들을 학습강요의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2012년 1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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