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사람은 그 누구여도 혼자여서는 안 된다

권영상 2013. 9. 22. 12:27

사람은 그 누구여도 혼자여서는 안 된다

권영상

 

 

 

 

 

 

그때 나는 성대에 문제가 생겨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입원은 처음이었다. 혹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했다. 혹이라는 말과 수술이라는 말. 그때 나는 그 두 말만으로도 충분히 당혹감에 떨었다. 당혹을 넘어 내 운명까지도 생각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수술 있겠습니다.”

담당의의 말대로 나는 그 즉시 입원을 했고, 아내는 심란한 표정으로 그날 오후 내내 내 곁에 있어주었다. 내 나이 오십. 한창 크는 딸아이와 그리고 아내. 단 세 사람뿐인 한 식구. 나는 이 ‘식구’라는 말을 오래도록 곱씹고 또 곱씹었다. 아내는 초조해하는 나를 데리고 병실 밖 긴 복도를 몇 번이나 천천히 걸어주었다.

“여기에 와 이렇게 좌초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아무 것도 아니라잖아. 의사 말 못 들었어요?”

아내는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 밤 9시쯤 아내는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딸아이의 저녁밥을 챙겨주어야 하고, 밀린 집안 일을 둘 수 없다며 갔다. 수술에 대비하려면 집안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아내는 아내만이 아니라 나의 보호자였다. 뭔가 새로운 일에 대처하기 위해선 헝클어진 집안 일을 그냥 둘 수 없는 사람이 아내다.

 

 

 

혼자가 된 나는 할일없이 병원 복도를 걸었다. 링거 거치대를 끌고 다니는 이, 휠체어를 타고 힘없이 움직이는 이, 그리고 피로에 지친 보호자들. 안면도 없는 그들에게 나는 아는 체를 해나갔다.

어디가 아프냐? 고향은 어디냐? 자녀는 얼마나 두었느냐? 그런 것들을 물은 까닭은 그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을, 연약해져가는 나의 친구로 삼기 위해서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엄습하는 외로움. 바깥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입원을 하고 보니 병원 바깥 사람들 모두가 먼 남같이 느껴졌다. 오직 같은 환자복을 입은 이들만이 나의 동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목에 깁스를 한 아홉 살 소년에서부터 의식이 희미한 아흔 살 할머니까지.

 

 

 

하룻밤을 자고 병상에 앉아 아침식사를 끝내고 났을 때다.

“수술시간이 갑자기 당겨졌습니다. 얼른 오르시지요.”

젊은 사내가 이동 침대를 끌고와 내게 독촉을 했다.

“이 사실을 집사람은 모르고 있소. 날 보러 여기 왔다가 내가 없으면 얼마나 낙심하겠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렸다 갑시다.”

나는 몇 번이나 사정을 했다. 그러나 담당의의 심부름을 할 뿐이라며 사내는 막무가냈다.

“제 아내가 오면 제가 수술실로 갔다고 좀 알려주세요.”

나는 병실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부탁을 하고는 하는 수 없이 이동 침대에 올랐다.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수술실로 혼자 외로이 간다는 게 두려웠다. 세상과의 작별을, 아니 아내와의 작별을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부림쳤다. 사내는 나를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간밤에 안면을 익힌 이들을 잡고 또 내 사정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마지막이 될이지 모를 손인사를 건넸다.

 

 

 

끝내 아내를 만나보지 못한 채 혼자 수술실로 들어섰고, 수술실의 문은 쿵, 닫혔다. 전신이 서서히 마취가 되고, 그후 나는 다시 아내를 만났다. 그때 나는 무엇이 두려웠던가? 혼자 놓여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교차로신문 2012년 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