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너를 버려야 하나

권영상 2013. 7. 9. 17:40

 

너를 버려야 하나

권영상

 

 

 

 

 

집에 개가 있다. 이름이 난나다. 9년을 키운 개다. 푸들이다.

딸아이가 중2 때 애완견 사주면 말 잘 들을 거래서 그 말에 속아 젖먹이를 분양 받아 왔다. 애지중지 돌보던 딸아이는 난나를 남겨 두고 대학 공부를 한다며 남의 나라로 떡 가버리고 말았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난나를 떠맡아 살게 됐다.

난나에게도 세월이 흐르는지 늙수그레하다.

오늘도 아내보다 내가 먼저 퇴근했다. 난나가 어둑한 거실에서 나를 반긴다. 두 발을 들고 낑낑대더니 불을 켜자, 얼른 서랍장 옆 제 자리에 가 숨는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지 나는 안다. 방바닥에 오줌을 쌌다.

거실에 들어서자, 난나가 나를 외면하고 앉아 있다. 미안하다는 뜻이다. 역시다. 방바닥에 오줌을 질펀하게 누어 놓았다.

 

 

 

“언제까지 네 오줌 똥을 치우며 살아야 하나?”
옷을 갈아 입고, 오줌 앞에 앉으며 나는 투덜댔다.

내 말귀를 알아 듣는 난나는 그게 미안한 모양이다. 제 얼굴을 뱃구레에 숨기고 꼼짝을 않는다. 그러다가 싫은 소리라도 한 마디 더 하면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오줌을 싼 난나가 처음엔 내 눈치를 보지만 이쯤 되면 내가 이 놈 눈치를 봐야한다. 더 이상 아뭇소리 않고 오줌을 치우고 소독약을 뿌려 방바닥을 닦는다. 그러고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오면 난나는 한 걱정 던 표정이다.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 본다. 오줌을 치워줘서 대단히 고맙다는 눈치다. 그런 의사 표현은 굉장히 분명하다. 어쩌면 인간끼리 주고 받는 언어 표현보다 더 정확하다. 약소개체가 터득한 정밀한 표정언어이지 싶다.

 

 

 

 

 

그런 표정언어로 내게 말해 놓고 이번에는 내 얼굴을 살핀다. 오줌 청소를 하고난 내 표정이 좋은지 나쁜지. 내 표정이 안 좋기라도 하면 내 발등에 다가와 제 몸을 얹거나 기댄다. 그래도 내가 뚱한 표정을 지으면 서랍장 곁에 가 조용히 앉아 나를 바라본다.

‘자, 이제부터 어떤 잔소리를 해도 좋습니다.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됐습니다. 당신은 내 오줌을 치워주었으니까요.’

영락없이 그런 표정이다. 선할 대로 선한, 적의라곤 찾아볼 길 없는, 착하고 여린 눈길로 나를 본다.

 


난나가 내게 지속적으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나의 포지션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난나에게 우리 집 구성원의 서열을 말해준 적이 없다. 일러줄 시간도 없고, 또 친밀히 지내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런데도 난나는 우리 집에서의 내 포지션을 알고 말없이 복종한다.

내가 집에 들어오면 난나는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앉는 자세도 항상 예의바르다. 그러나 내가 집에 없으면 다르다. 오줌 똥을 누면 빨리 치워주지 않는다고 아내에게 성화를 댄다. 제때에 밥을 주지 않으면 왜 밥이 늦느냐고 소리치고, 사료가 맛없으면 다른 걸로 내놓으라며 밥그릇을 엎는다. 난나가 이처럼 행패를 부리는 까닭은 저의 포지션 때문이다.

 

 


나는 우리 식구를 나와 아내와 딸아이, 이렇게 셋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난나는 전혀 다르다. 저까지 넷으로 생각한다. 그것까지는 좋다. 더욱 가소로운 건 난나가 매기는 우리 식구들의 서열이다. 나는 나, 아내, 딸아이, 이렇게 포지션을 잡는데, 난나가 생각하는 포지션은 다르다. 나 다음이 저다. 그리고 제 아래가 딸아이이고 맨 밑이 아내다. 아내를 제 수하로 생각한다. 저에게 밥을 주고 오줌 청소를 군말없이 해주니 제 ‘밥순이’ 정도로 안다. 그래서 내가 집에 없으면 아내에게 행패를 부리는 모양이다.

 

 

 

개가 사람과 오래 살면 제 모습을 잊고 사람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옛말이 틀린 데가 없다. 오줌 똥을 날마다 치워주는 일이 고달프긴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저를 우리 집의 한 식구로 생각하는 놈을 무슨 수로 내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난나 목욕날이다.

 

(교차로신문 2010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