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이 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

권영상 2013. 7. 4. 17:58

 

이 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

권영상

 

 

 

 

“해 뒤치기 전에 탁주나 한잔 하지?”
글 쓰는 선배께서 아침에 전화를 주셨다. 연말이면 늘 그분을 만나 뵈었다. 서로 쓸쓸하지 않으려고 만나 저녁을 나누거나 했다. 더구나 얼마 전에 시집도 한 권 내시고 해 나는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을 드렸다.
사당에서 4호선 당고개행 전철을 갈아탔다. 요행히 비어있는 자리가 있었다. 자리에 앉았다. 연말을 하루 앞둔 설레임 같은 것이 느껴졌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연말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 손에 선물상자가 들려 있었고,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렇게 전철이 한강을 막 건넜을 때다.

 

 

 

다리를 건너느라 덜컹거리던 금속성 소리에 이어 이번에는 아주 친숙한 소리가 아련히 귀에 들렸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어폰 속에서 튀어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뜨고 그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그쪽 방향엔 몇몇 자리없는 이들이 서 있어서 내 시야가 막혔다. 그러는 사이로 그 아득한 듯한 소리가 차츰차츰 가까이로 다가왔다. 누군가 매우 절실히 부르는 ‘소리’였다. ‘음악 씨디를 파는 장수인가 보구나!’ 했다. 그런 이들이 가끔 흘러간 팝송을 들고와 승객들의 향수를 자극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단련되고 세련된,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소리는 아니었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그건 누군가 힘겹게 부르는 강원도 아리랑이었다. 서있는 사람들 뒤편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예사의 소리가 아니었다. 음반에서 울려나오는 세칭, 명창이라는 이들이 부르는 잘 닦인 소리와는 달랐다. 힘들게 목숨을 부지해가는 고단해질 대로 고단해진 인생을 사는 소리였다. 조금은 늘어지는 듯한, 힘에 겨운 그 소리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낯익은 소리였다. 예전, 시골 농투성이이신 당숙께서 감자밭 이랑을 타고 앉아 길게 빼시던 그 목쇤 소리였다. 나는 인생살이에 절은 그 소리가 유유히 다가오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소리’가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타났다. 내 예상은 맞았다. 세월의 힘든 무게 탓인지 허리가 약간 굽은, 중절모를 쓴 노인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소리를 몸안에서 몸밖으로 힘들게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느라 그분의 걸음걸이는 너무도 느렸다. 전철에서 가끔 적선을 바라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과는 전혀 차림새가 달랐다. 그의 손에 잡힌 적선 주머니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건 백화점이나 슈퍼에서 개업 기념으로 가끔 주는 큼지막한, 쌀 서너 말은 족히 들어갈 곤색 헝겊 장가방이었다.


 

그분은 그 장가방의 아구리를 두 손으로 벌려 잡고는 느릿느릿 땀에 전 소리를 부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얼핏 보기에 연말 음식을 장만해야겠으나 가진 게 아무것도 없자, 읍내로 가던 발길을 돌려 그만 전철에 오른 그런 모습이었다. 내 눈이 그르지 않다면 그랬다. 그분의 그 어디에도 세상만사에 닦이고 닦인 데라곤 없었다. 나는 질박한 그 촌로의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오늘 쓸 저녁 값의 한 모퉁이를 떼어 얼른 그 쌀 서너 말들이 장가방 속에 넣어드렸다. 그분은 그런 나의 일에 무심한 듯 반쯤 감은 눈으로 소리를 하며 내 앞을 지나갔다.

 

 


목적지에 다다라 나는 전철에서 내렸다. 전철 계단을 걸어오르며 우스운 생각이지만 전철에서 떼어낸 것만큼 간소하게 저녁 식사를 하리라 했다. 그러나 탁주에 구운 생선 두어 도막이면 충분한 선배 시인의 저녁 식사에서 더 무엇을 떼어낼까 하며 웃었다. 약속 장소인 을지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기온이 떨어져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골목에서는 활기가 느껴졌다.

 

(교차로신문 2009년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