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골목길을 빼앗긴 아이들

권영상 2012. 12. 27. 15:14

 

골목길을 빼앗긴 아이들

권영상

 

 

 

 

이미 창밖에 해가 졌다. 늦은 여름이라 선선한 감마저 있다. 일몰 뒤의 붉은 노을을 내다 보고 있을 때다. 아내가 식탁위에 저녁을 차리고 있다. 나도 얼른 다가가 수저를 놓는다.

“나래야, 저녁 먹어라!”

아내가 딸아이 방을 향해 소리친다.

“알았어.”

딸아이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고도 얼른 나오지 않는다.

“얼른 와서 밥 먹으라니까!”

아내가 또 한 번 소리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왠지 오래 전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우물가 골목에서 해가 지도록 놀 때면 어머니는 담장 밖을 향해 나를 불렀다.

“영상아! 저녁 먹어라!”

지금의 아내가 딸아이를 부르듯 어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알았어.’하고 대답은 하지만 우리들의 놀이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해질 무렵이면 멀지 않아 우리가 놀던 놀이도 끝나고 만다. 그 절박함 때문에 우리들의 놀이는 점점 더 재미있다. 그러니 놀던 공깃돌이나 사금파리를 놓고 벌떡 일어설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또 들려온다.

“얼른 와 밥 먹으라니까!”

어머니의 독촉을 생각하면 빨리 달려가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아직 밥 먹으라는 부름을 받지 못한 친구들 때문이다. 그들을 두고 나만 집으로 달려간다는 건 안 될 일이다. 암만 나이가 어렸어도 그 정도 염치는 있었다.

 

 

“전화 좀 받느라고...... 미안해요.”

몇 번이나 아내가 불러낸 끝에 딸아이가 걸어나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생각해 보니, 내 어릴 적 놀이터는 주로 골목길이었다. 한 쪽은 흙담장이고, 맞은편은 편백나무 긴 울타리, 그 사이에 있는 골목길. 흙담장 옆엔 늙은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골목의 푸른 그늘이 되어 주어 놀기가 더욱 좋았다. 골목길이라 해 봐야 우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만한 길이었다. 골목길 입새엔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리는 놀이를 하다 목이 마르면 두레박으로 물을 퍼 양껏 마셨다. 배가 고파도 우물물로 배를 채웠다.

골목에서는 주로 술래잡기, 땅따먹기, 비석치기, 깡통차기, 공기놀이, 자치기, 말뚝박기, 소꿉놀이나 팽이치기를 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조그만 했다. 아홉 집이 사는 농촌이었다. 그 중에 내 또래의 아이들은 넷이고 나머지는 형뻘이었다.

 

 

학교가 파하여 집에 돌아오면 대개 골목에 놀러 나갔다. 골목엔 나보다 먼저 온 아이들이 있었다. 둘이면 둘이 할 수 있는 비석치기나 땅따먹기, 아니면 공기놀이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머릿수가 차면 술래잡기나 깡통차기를 했다.

그때가 한창 봄이 무르익을 때다. 깡통을 멀리 차내고 숨으러 달아날 때다. 우리는 숨을 곳을 향해 제각각 골목길을 뛰었다. 담장 모퉁이나 짚가리 뒤, 감나무 뒤나 대문 안. 그렇게 숨어숨어 달아나다 골목 끝에서 힘에 겨워 털썩 주저앉을 때다.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지던 들판에 나는 놀랐다.

골목 끝에서 확, 열려나던 드넓은 시야.

 

 

파란 보리밭 뒷벌이 거기 마치 무슨 대양처럼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늙은 소나무에 올라갔다. 아버지 일을 도울 때면 늘 가던 뒷벌이고, 호숫가에 소를 먹이러 갈 때도 건너질러 가던 곳이 그 뒷벌이었다. 그러나 그날, 골목을 숨어숨어 달아나다 그 골목 끝에서 만난 뒷벌의 눈부신 보리밭은 처음 봤다.

나는 깡통차기를 하러 돌아가는 것도 잊고 해지도록 늙은 소나무 위에서 넓은 세상과 마주했다. 그 방향으로 가면 경포호수가 있고, 그 건너편엔 어린 우리들의 시선을 끌만한 호텔의 네온사인이 있고, 무엇보다 거기엔 자동차들이 달리는 한길이 있었다. 대체로 읍내로 가는 어른들은 그 길에서 차를 탔다. 마을에서 이웃마을로, 이웃마을에서 더 큰 읍내로, 그 읍내에서 더 큰 대처로 나가는 길은 마을의 앞쪽이 아니라 뒤쪽이었다.

 

골목은 우리들의 놀이터만은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흙을 곱게 쓸어 사금파리로 글씨를 배운 곳도 거기 골목이었고, 흙을 만지면서 계절의 체온을 느꼈던 곳도 골목이었다. 까진 무릎팍에서 빨갛게 밀려나오던 피도 골목 흙으로 덮어 멎게 했고, 나이 많은 이웃 아이들을 형이라 부르는 법을 배운 곳도 거기 골목이었다.

 

 

그런데 지금 골목에 나가면 아이들이 없다. 굴렁쇠를 굴리거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느라 소란을 피워야할 아이들이 없다. 고요하다. 누가 아이들을 골목에서 몰아냈을까. 학원도 학원이지만 시멘트라는 문명이 아닐까 싶다. 골목은 온통 시멘트투성이다. 민들레 한송이 재겨디디고 피어날 틈이 없다. 그러니 골목길은 더 이상 놀이터의 구실을 못한다. 골목이 주차장이 된 것도 아이들을 쫓아낸 원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른들의 자식에게 거는 삿된 욕심도 있다. 학교가 파하면 교문 앞에서부터 학원버스는 아이들을 주워담아 간다. 너무 오랫동안 그 일에 단련되었기 때문에 아이들마저 공부에 매달리는 일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학원으로, 학원으로 쫓아다니는 게 힘들지 않냐고 아이들에게 물으면 ‘놀면 뭐해요? 공부해야지요.’ 한다. 물어보는 사람이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누가 아이들을 이렇게 물들여 놓았을까?

 

이제는 흙 덮인 골목길을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공부, 공부보다 이제 사람답게 사는 법을 스스로 배우도록 해 주어야 한다. 서로 어울려 놀고, 그러면서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협동하고, 감싸주는 일이 소중하다는 걸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 선진국 수준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여전히 국민의 87퍼센트가 불행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가 부르짖어온 공부, 공부가 행복과 거리가 먼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골목에 아이들이 나와 노는 모습을 본 지 너무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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