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기를 업어키우던 아버지

권영상 2012. 12. 27. 14:32

 

아기를 업어키우던 아버지

권영상

 

 

 

 

늦가을이라 그런지 오후 6시에도 결혼 예식이 있다. 어떻든지 가을을 넘기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역력하다. 모처럼 노는 토요일인데 친척과 친면 있는 이들의 혼사 때문에 하루종일 길거리에서 돈다. 오후 2시 예식이 있고, 6시에 있으니 집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어정쩡해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간신히 6시 예식에 대었다. 혼주가 내는 식사를 하고, 대학로 붐비는 길거리를 걸어 전철에 올랐다.

“피곤하다!”

그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토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와 여태 길 위에 내 몸이 있다.

단풍이 져가는 시즌의 토요일 전철 안은 만원이다. 나는 선 채 꼬박 꼬박 졸며 와 남부터미널역에 내렸다. 검표기를 통과하고 나서 계단을 오른다. 남부터미널은 유일하게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역이다.

계단이 가파르다. 층계도 유난히 많다. 힘든 몸을 이끌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데 보니, 아이를 업은 아버지가 앞 서 간다. 요사이 아이 업은 부모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선지 참 반갑다. 아버지는 두 팔로 아이의 엉덩이를 감싸 잡고, 아이는 등허리에 엎드려 자는지 두 다리가 축 내려뜨리고 있다. 신고 있는 신발이 빨간 계집아이 신발이다. 걸어 오르는 몸동작을 따라 흔들흔들하는 두 발의 모습이며, 등허리에 착 달라붙어 잠자고 있는 모습이 왠지 아름답다. 힘들게 오르던 계단 오르기가 갑자기 가벼워진다. 아이를 업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나도 걸음을 맞추어 올랐다. 아이를 업어 키우면 다리가 벌어진다고 꺼리는 엄마들은 모르겠지만 볼수록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어휴, 녀석 참 많이 컸구나!”

계단을 오르던 아버지가 아이를 업은 채 걸어 올라온 계단을 돌아다본다.

머리가 벗겨진 예순 후반의 나이다. 옷차림이 아이의 젊은 아버지 같지 않다. 할아버지 아니면 외할아버지겠다. 그이도 손녀를 데리고 나처럼 누군가의 예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아들네에 손녀를 데려다 주러 가는 지도 모르겠다.

“힘드시겠습니다.”

괜히 말을 건넸다.

“그래도 오를만 합니다.”

숨을 몰아 내쉬던 그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그이는 아이를 업고 건너편 방향인 5번 출구로 가고, 나는 3번 출구를 향했다. 계단을 오르다 흘낏 그이를 봤다. 혼자 오르기에도 가파른 계단길을 한발 한발 쉬지 않고 딛어오른다. 예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그래도 오를만 하다는 건 순전히 등에 업은 녀석이 피붙이 손녀인 까닭이겠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예전의 내 아버지가 떠오른다.

 

 

유년 때다. 그 무렵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유독 이것만은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날이 바로 단오였다. 음력으로 5월 5일. 모르긴 해도 양력으로 6월쯤, 덥다면 더운 날이었겠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단오구경을 갔다. 강릉의 단오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옛날에도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모내기를 마친 뒤라도 농촌의 일이란 늘 바쁜 법. 아무리 바빠도 강릉만은 달랐다.

단오 터에서 무얼 봤는지 기억은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그날, 저녁 늦게 비가 내렸다는 거다. 부모님은 비를 맞으며 어두워오는 단오 터를 떠났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으셨다. 단오 터에서 집까지는 시오 리가 넘는 길이었다. 이렇다 할 우비도 없이 비를 맞으며 컴컴한 길을 얼마만큼 걸었을까.

 

“이제 그만 아이를 내게 주어요.”

나를 업고 가는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가 재촉했다.

그러고도 또 얼마큼 더 가서 아버지는 나를 내려놓으셨다. 그때 내 나이 대여섯 살은 되었음직하다. 어머니는 내려놓은 나를 들쳐 업으셨다. 시오 리 길을 걸어 단오 터에 갔고, 단오 터 인파 속을 걸었으니, 다섯 살 내가 피곤했겠다.

어둡고 컴컴한 밤길을 얼마간이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애를 내게 주게.”

이번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재촉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선 채 아버지 등으로 넘기셨다. 나는 잠결에도 내가 다시 아버지 등으로 넘어가는 걸 알았다.

 

 

내 머리에는 비가 내렸다. 어머니 머리에도 비가 내렸고, 아버지 머리에도 비가 내렸겠다. 부모님과 등에 업힌 어린 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비를 맞으며 그 먼 밤길을 걸으셨다. 비 맞으며 걷는 일도 힘든 일인데 자식까지 업었으니 그 길이 고단하셨을 게 분명하다. 다섯 살이면 깨워서 걸려도 될 나이이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끝까지 번갈아 가며 나를 업으셨다.

거기엔 그만한 일이 있었다. 내가 막내였기 때문이다. 형님 두 분은 나와 20년 차이다. 그 무렵 그 두 형님은 이미 결혼을 하여 조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 두 형님 밑에는 세 분의 누님이 있었다. 나는 우리 육남매의 막내로 어머니는 나를 당신 나이 마흔에 낳으셨다.

 

내가 다섯 살인데도 업혀 그 먼 길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런 이유일 듯싶다. 나이를 자신 후에 얻은 아들이라는 것과 막내라는 것. 그때 아버지 연세는 모르기는 해도 쉰이 넘으셨을 테니 다섯 살 먹은 자식을 업는 일이 힘드셨을 테다. 무엇보다 좀 걸려 가고 싶어도 어머니의 성화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어린 애를 어떻게 이 비에 걸려 가려하느냐고.

 

비가 내리는 밤길은 6월이어도 으스스했다. 그럴수록 나는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아버지 등에 달라붙었다. 그때 아버지의 등에서 밀려오던, 땀에 얼룩진 따스한 체온이 업혀가는 내 몸을 녹여주었다. 아버지의 따스한 등에 댄 내 볼 때문에 비가 내려도 덜 추웠다.

“애가 감기 들라.”

어머니는 그러셨을 테고, 아버지는 나를 가끔 추어올리며 걸으셨을 그 시오 리 길.

그 후, 나이를 먹어 나도 자식을 낳았다.

 

 

내가 딸아이를 키울 즈음엔 어찌 된 풍습이 아이 업는 게 나쁘네 마네 했다. 그런 까닭에 놀이공원을 가든 어딜 가든 가슴에 안았다. 멀리 가는 길엔 승용차가 있었고, 가까운 길엔 유모차가 있었다. 이러고저러고 하는 사이 아이는 내 가슴에서 뛰쳐나가 금방 성장하고 말았다.

딸아이를 업어 키우지 않아 그런가. 부녀간의 애틋한 정이 좀 덜한 듯싶다. 나도 딸아이를 그렇게 대하거니와 딸아이 역시 아비인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 모자란 부분이 있는 듯하다. 업어 키우지 않아 그렇다는 건 좀 지나친 듯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에겐 잘못된 육아법이 한 둘이 아닌 듯하다.

아이를 업어 키우면 아이 체형이 나빠지네 어쩌네 하는 것이며, 모유를 먹이면 엄마 가슴이 망가지네 어쩌네 하여 우유를 먹이는 풍습도 문제다. 독립심을 키운다며 젖먹이아이 방을 만들어 따로 재우는 것도 뭔가 잘못된 육아법이다. 한 때, 아이를 모로 재워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던 일은 지금 어찌 되었는지.....

 

자식에게 가장 후덕한 육아법은 따뜻한 부모의 등맛을 보여주는 일이 아닌가 한다. 자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부모에 대한 믿음보다 더 큰 백그라운드는 없다. 그 믿음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이 등이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큰다는 선현들의 말이 있다. 자식은 훌륭한 육아기술로 크는 게 아니다. 부모의 살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등보다 큰 교육장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업어키우면 다리가 벌어진다는 말도 믿을 수는 없지만 벌어진단들 그게 부모 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깊은 정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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