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에 만난 아내의 동창
권영상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고, 아내 이야기다.
아내가 초등학교 동창의 자녀 결혼식에 다녀왔다. 멀리 인천에서 있었다. 직장에 매여 사느라 아내는 동창 모임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동창은 빠질 수 없는 고향 친척이라 폭설을 뚫고 갔었다. 결혼식에 다녀온 아내는 근 40년만에 만난 동창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두 학급이었다는 고향 동창들이 거의 다 모인 모양이었다.
“숯껌댕이라고 얼굴이 까매서 놀림받던 머스매가 있었어. 키 크고 호리호리한. 그 애가 글쎄, 종로에서 등산장비 가게를 한다는데....”
정치인들이 만든 산악회와 손을 잡고 키운 탓에 등산용품 가게가 유명해졌단다. 어렸을 때 새까맣던 얼굴이 희고 둥글둥글해져 너무 멋져 보이더라며 호들갑이다.
돈을 많이 벌어 역삼동 고급아파트에 산다는 ‘개똥지바꾸’라는 남자애 이야기며, 모 지자체 부지사인데 찾아간 동창들을 소홀히 대접해 미움을 받고 있더라는 '깡통따개'라는 사내의 이야기, 일찍이 대학 국악과에서 고전 무용을 배워 일본을 드나들며 날리던 애가 강릉인가 원주 어디서 카페를 한다는 이야기.......
“여보, 내 말 들어봐. 동창 중에 '자불자불'이라는 애가 있었어. 공부시간마다 자불자불 잠만 자던 남자애였는데, 착한 여자와 결혼 해 없는 살림에 늦도록 노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대나 봐. 근데 그 착한 마누라가 그만 치매에 걸렸다네. 시부모 모시느라 인생다운 인생 살아보지도 못하고 그만. 다들 너무 안 돼하는 거야.”
“안 되긴 안 됐다. 이제 좀 살아보려 하니 그만 그렇게 되네.”
아내의 동창이라면 쉰 나이의 후반이다. 이제 인생맛이 뭔지 알 때에 몹쓸 병에 걸렸다니 내 마음도 안타까웠다. 어쩌면 아내가 이런저런 동창들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우울해하는 것도 그 배경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 안 됐는 건. 그 자불자불이 술을 먹고 다리를 건너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리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거야. 결혼식에 안 오면 뭐 어때. 놀랍게도 목발을 짚고 절름거리며 나왔더라구. 근데 더욱 놀라운 건 그 착한 시골동창들이었어. 나는 그들을 보고 너무 놀랐어. 내가 보기에 그들은 착한 별에서 온 순수한 영혼들 같았어.”
아내가 ‘순수한 영혼’ 타령을 하는 이유는 이랬다. 그 즉석에서 그 자불자불을 돕자는 의견이 나와 모든 동창들이 일시에 호응을 해 치료비를 만들어 줬다는 거다.
“근데, 동창들 중에 한 아이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더니 내 모습이 옛날의 엄마모습을 꼭 닮았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쯤에서 이번엔 아내가 울먹였다. 울먹이더니 끝내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휴지를 뽑아주며 아내를 달랬다. 눈물을 닦아내며 아내가 말을 이었다.
“그때 엄마가 이웃 공사장 사람들한테 밥을 해줬는데, 엄마가 해주신 밥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애길 하잖아. 그 무렵 엄마가 우리 7남매 키우느라 공사장 아저씨들 밥을 해 주셨던 거야. 난 왜 그때 그 일을 그렇게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
아내는 그 말을 그치고도 한참을 더 울었다.
“고래수염이라고 우리 옆 동네 살았는데, 그때도 키가 작았는데 그 작은 애가 호호백발이 되어 가지고 온 거야. 허리까지 꼬부라져 가지고.”
울던 아내가 이번에는 흉내를 내며 깔깔깔 웃었다.
“고래수염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수염 하나 없는 애가 원양어선 타다가 허리를 다쳤다는 거야. 허리를 구부정하게 해 가지고 다니는데 그렇게 낙천적일 수 없어.”
밤 늦도록 동창들 이야기를 하더니 양치질을 마치고나선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근데, 벌써 죽은 애들이 여덟 명인가 된대.”
이 이야기를 맨 나중에, 그것도 아내는 무겁게 꺼냈다. 어쩌면 이 이야기만은 입밖에 내지 않을 작정인지도 몰랐다. 그걸 이 깊은 밤에 굳이 꺼내고마는 건 홀로 가지고 잠들기에 힘든 짓누름이 있어서가 아닐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
“누구나 언젠간 가는 건데 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이제 잘 밤에 그걸 깊이 이야기하면 또 뭘할까.
“그래도.......”
아내가 그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이 육십이 가깝도록 인생을 살자면 인생길에서 중도에 내려선 사람이 없을 리 없다. 누구나 험한 인생을 살아내자면 갖은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그들이 일찍 떠난 건 인생살이가 힘에 부치든가 아니면 운이 받쳐주지 않아서다. 아내가 울며 웃으며 한 동창들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몸을 다치거나 아내를 잃거나 한 이야기가 많다. 한 해를 살다 가는 낙엽들도 주워보면 상처없는 잎이 없다. 하물며 50여 년을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자식 키우고, 부모 모시고, 내 집 구하고 그러며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야 오죽할까. 어찌보면 살아낸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지금껏 멀쩡히 사는 우리들은 운이 좋아 그 불행을 피한 것일 뿐 우리가 잘 해 버젓한 게 아니다.
이렇다 할 학벌도 없이, 배경도 없이,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5,60년을 버텨왔다는 건 기적 이외 다른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거실에 혼자 남아 캄캄한 창밖을 내다본다.
아파트 마당의 희미한 가로등불만 호젓이 남아 있다. 그 등불 아래로 퇴근이 늦은 사내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지나간다. 그가 젊은 날의 나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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