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참 행복한 일

권영상 2012. 11. 19. 14:52

 

 

 

 

(예전의 글입니다. 이 초승달 사진 때문에 옮겨왔습니다.)

 

참 행복한 일

권 영 상

 

 

요즘 새 학기 철이라 수업시간이 활기차다.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려는 아이들이 참 많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갓 올라온 일학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며칠 전이다. 내 질문에 손을 번쩍 들고 대답을 한 아이가 있었다. 눈망울이 떼굴떼굴한 녀석이었다. 대답이 좀 서툴렀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잊지않고 칭찬을 듬뿍 해주었다. 그렇게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서는데 누가 내 옷소매를 잡았다.

“선생님, 재미있는 책 한 권 빌려드릴까요?”

‘재미있는 책’을 빌려주겠다니! 이건 정말 흥미있는 일이다. 나는 얼른 “좋지!” 하고는 그의 교실을 나왔다.

3월이고, 또 여러 반 수업을 들어가다 보니 나는 바빴다. 그 일도 금방 잊어버렸다. 아마 새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들뜬 그도 그 일을 잊었으려니 했다. 그 일 있고 며칠이 되도록 나는 그 ‘재미있는 책’ 소식을 더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엊그제다.

골목길을 걸어 퇴근을 하는데 등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조그마한 녀석 하나가 내리막길을 조약돌처럼 돌돌돌돌 굴어 달려왔다. 그의 손에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재미있는 책을 빌려주겠다던 그 눈망울이 떼굴떼굴한 녀석이다.

 

“아빠가 좀전에야 다 읽었어요. 그래 이제야 가지고 오는 길이에요.”

숨을 몰아쉬며 내게 빌려주겠다던 그 ‘재미있는 책’을 내밀었다.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 이었다. 선생님, 늦게 보여드려서 미안해요, 그런 눈빛으로 내게 주고는 돌아섰다. 나는 달려오던 길을 되집어가는 그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내게 빌려 주겠다고는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다 못 읽는 아빠 때문에 그간 애태우며 기다렸을 그의 마음을 생각했다. 아빠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탁, 넘길 때를 그는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기다렸을까.

 

다음 날, 나는 그 녀석의 이름이 형태라는 걸 알았다.

형태는 그날부터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책 다 읽으셨어요?”, “재미있지요?”, “우동 먹어봤어요?”하고 물었다. 형태는 저희 국어를 가르치는 나를 그런 방식으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뭔지 아세요? 선생님.”

오늘은 복도를 걸어가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니까,

“동네 형이 그러는데 가슴이 나오는 게 사춘기랬어요.”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저만큼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 웃음 한 줄이 피어올랐다.

 

   

 

“이런 게 행복 아닐까!”

나는 주변 사람들이 듣도록 소리쳤다.

때로 사람이 사는 일의 사품을 들추어 보면 참 행복한 일들이 더러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