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작별
권영상
고향에 가면 가끔 아버지가 일하시던 논이나 밭에 가 본다. 밭둑길이나 논두렁길을 걷고 싶어 거길 찾는지 모른다. 예전의 논에는 논귀퉁이에 물웅덩이를 두었다. 강릉 에서는 이를 ‘파래창’이라 부른다. 파래창은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가뭄에 퍼올려 논에 대는 일종의 저수탱크인 셈이다.
파래창을 지날 때면 가끔 보는 일이 있다. 고요한 물위에 파문을 일으키며 툭 떨어져 죽는 잠자리들이다. 하필이면 파래창에 떨어져 죽을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하늘을 나는 놈이니까 떨어지는 곳이 어디 파래창만일까? 하고 말았다. 근데 잠자리가 파래창만이 아니라 개울물이나 고여있는 늪에도 종종 떨어져 죽는 걸 본다. 왜 거기일까? 잠자리는 습성이 서늘한 데를 좋아한다. 그 까닭에 여름이면 선선한 산위에 올라가 산다. 그러다가 여름이 지나고 짝짓기 시기가 되면 물가로 내려와 짝짓기를 하고는 가을이 임박하여 물에 떨어져 죽는다. 물속에 살고 있는 장구벌레나 물속 곤충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다. 제 몸으로 그들을 살찌우는 것은 그들을 잡아먹고 자랄 장차 태어날 자신의 종족들 때문이다. 잠자리는 자신도 물속 애벌레 시절 그들의 생명을 딛고 성장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후대를 위해 그렇게 죽는 죽음이 나를 찡하게 했다.
그 까닭을 알고부터 파래창이나 개울물에 떨어져 죽는 잠자리를 보면 그들의 죽음에서 비장미를 느낀다. 제 몸을 바쳐 다른 수생생물을 키우고 그들의 목숨이 또 자신의 후손을 살리게 한다는 먹이사슬의 비정한 순환 때문이다. 잠자리들은 그렇게 한 생을 살다가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면 우리네 들판에서 사라지고 만다.
계절이 가을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
거리를 조금 비켜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불타는 듯 산이 곱다. 붉게 물든 건 단풍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팥배나무잎들이다. 노랗게 물든 건 생강나무, 은행나뭇, 느티나무잎들이다. 이들 사이로 걸어들어가면 마치 수백 개의 등불을 켠 거리를 지나듯 환하다. 대낮도 이렇게 어리고 눈을 부시게 하는 대낮이 없다. 그런 밝은 빛깔도 가만히 보면 한 고비를 넘겼다. 이미 희미한 어둠 쪽으로 그늘져 있다.
느티나무가 무리지어 사는 숲길을 걷다가 멈춘다. 이 숲 어딘가로 숨어들어온 바람의 손길이 보인다. 몇 걸음 앞 쪽이다. 느티나무 한 가지에서 후둑, 느팃잎이 떨어진다. 이웃가지들을 흔들며 바람이 개구쟁이처럼 이리저리 뛰어간다. 바람이 닿는 곳곳마다 후둑후둑 느팃잎이 진다.
개구쟁이 바람은 선발대다. 이윽고 굵은 바람이 나무를 툭툭 건들면서 지나간다. 놀란 느팃잎이 한 무덕씩 소스라치듯 떨어진다. 마치 나무에 쌓인 눈뭉치들처럼 폭싹폭싹 떨어지듯 쏟아진다. 이 숲길도 가을의 절정을 넘어선 모양이다. 나무들마다 가녀린 나뭇잎조차 붙잡고 설 힘이 없다. 누가 툭, 건들기만 해도 힘없이 떨어진다. 근데 그 떨어지는 모습이 서럽기보다 아름답다.
나는 또 몇 발짝을 걷다가 멈추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본다. 낙엽은 펜촉같이 작은 몸을 뱅글뱅글 회전시키기도 하고, 둘씩 셋씩 멀리 날아가기도 하고, 개울물을 가는 종이배처럼 바람을 타기도 하고, 새처럼 높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유유히 날아 내리기도 한다. 노란 느팃잎 한 줌이 빙그르르 날아 산비탈을 타고 내린다.
“참 좋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불쑥 나왔다.
생의 종착역을 향해 질주해 가는 낙엽의 모습을 보며 ‘좋다’고 하는 말은 옳지 않을 듯 싶다. 늦가을은 비정하다. 수목의 수분 공급을 끊는다. 기온도 생존점 이하로 강하시킨다. 그건 나무들에게 고통중의 고통이다. 그 고통의 끝에서 나뭇잎들은 남은 양분을 나뭇가지에 다 넘기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그 마지막 비명이 낙엽이다. 그런데 그 일이 왜 멋지고 좋은 일로 보일까. 잠자리가 웅덩이물에 떨어져 죽는 일이나, 낙엽이 지는 일에서 아름다운 작별을 엿보기 때문이지 싶다.
이 땅에 와 발을 붙이고 살다가는 것들은 모두다 낙엽처럼 떨어져 제 몸을 흙에 바친다. 그 배후엔 다음 생을 위한 자기 희생이란 이념이 숨어있다. 그래서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건 모두 아름답다. 늦은 봄 떨어지는 꽃잎도, 추운 한겨울에 내리는 백설도, 수십만 년만에 쏟아져내리는 유성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낙하한다.
가을이 깊다. 다시 돌아서지 못할 만큼 너무 깊다. 내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가 있다. 춤추듯 떨어지는 낙엽들을 한번씩 더 보아준다. 비록 나와 아무 촌수도 없는 나무들이지만 작별은 아쉽다. 그들과 하는 오늘 이 순간의 작별이 어느 세상 어느 하늘밑에서 또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낙엽들과 하는 이 가을의 작별 연습이 그래서 행복하다.
빙그르르, 낙엽 한 장이 떨어진다. 우주의 시선이 그리로 모인다. 떨어지는 것에 대한 남아있는 자들의 깨끗한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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