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떠는 아빠
권영상
갑자기 누군가 출장을 가게 되었다며 내게 보강을 요청했다. 꼭 모처럼 쉬려고 빈 시간을 벼르고 있을 때면 이런 부탁이 온다. 나는 할 수 없이 일어서서 보강 교실로 갔다. 다행히 1학년이다. 들고간 종이를 한 장씩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아빠가 어떨 때에 어떻게 잘난 체 하는지를 솔직하게 써 보라 했다. 아이들은 이 뜻밖의 질문에 오히려 흥미있어 했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옷을 고르고, 승용차를 선택하는 데도 아내의 결정이 중요하고, 이사하는 일이며, 외식하는 일도 아내의 결정없이 남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만큼 남편의 입지가 좁은 게 사실 아닌 사실이다.
어느 펑펑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 데 버스기사가 눈을 보더니 옛이야기를 꺼냈다.
그날도 버스 운행 중이었다. 앞서 가던 승용차가 고장이 났는지 눈 속에서 멈추어 서더란다. 차를 몰던 여자가 나와 손을 호호 불며 본닛을 열어 보고, 뒷 트렁크를 열어보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버스기사가 내려 승용차에 다가가 보니 차 안에 웬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구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제 남편인데 아는 게 없어요.”
그러며 여자가 차를 좀 손봐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더라는 거다.
집안에서건 밖에서건 남편이란 별로 쓰이는 데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찔끔했다. 그 남자의 모습이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런 남편들이 자식에겐 어떤 아버지로 비춰질까가 가끔 궁금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아이들이 써준 걸 모아 내 방으로 가져와 하나하나 읽었다. 메모해 두고 싶은 건 하나 하나 적었다. 혹 어디 쓰일 데가 있지 싶어서.
“아빠와 동네 산을 오를 때다. 힘들어 하는 날 보자 아빠는 ‘너만했을 때 아빠는 산을 올라도 펄펄 날았다.’ 그러며 잘난 체 했다.”
“학교에서 받아온 내 성적표를 보고 아빠가 잘 난 체 했다. ‘아빠는 매일 할아버지 일 도와드리고도 시험만 봤다 하면 전교 1등이었다. 전교 1등.’”
“아빠 보고 용돈 좀 올려달라 하자 아빠는 '나 어렸을 땐 신문 돌려 할아버지 용돈 드리면서 학교 다녔다. 그런데 넌 아빠 용돈은 못 줄 망정 올려달라고?’ 그럴 때 아빠가 얄미웠다.”
“수영장에서 헤엄 못 치는 날 보고 아빠가 혀를 찼다. ’아빠 너만 했을 땐 울릉도를 왕복했다, 포항에서.”
“감기 걸렸을 때 내가 감기약 안 먹으려 하자 아빠가 잘 난 체 했다. ‘아빠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감기에 걸려 고생할 때 할아버지가 2홉들이 소주에다 고칫가루 타 주는 거 먹고 감기 떨구었다. 어른이 주시면 술도 먹었다. 술도. 그것도 2홉들이.”
나는 아이들 글을 하나 하나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었는지 모른다. 나도 예전 딸아이가 어렸을 때 그랬다. 바지 사달라고 조르면 “아빠는 바지 하나로 초등학교 6년을 입었다.”라거나 밥을 안 먹을 땐 “아빠는 산을 퍼주어도 그거 마다않고 다 먹었다.”라고 을러메었다. 뻥에 가까운 허풍이다. 허풍도 보통 허풍을 친 게 아니다.
아버지들은 다 한가지다. 시험은 봤다 하면 전교 1등이고, 산은 올랐다 하면 날아올랐다. 헤엄은 쳤다하면 울릉도를 왕복했고, 밥은 산을 퍼주어도 군소리없이 다 먹었다. 이런 식이다. 아버지에겐 누구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데가 있다는 걸 반복적으로 말해줌으로써 아버지는 자신의 신성을 쌓아간다.
그러나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의 허풍이 우습지도 않다. 별로 잘 하는 것 없는, 가정 살림에 별 보탬 못 되는 남편이면서 자식 앞에서 큰소리치는 남편이 어쭙잖겠다.
어쨌거나 너댓 살 때까지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허풍을 믿는다. 외딴 숲에서 호랑이를 만나 주먹 한 방으로 쫓아냈다 해도 자식은 믿는다. 그러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받아들인다. 매우 강한 존재이며, 못할 게 없는 매우 신비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란 존재는 사뭇 크기만 하고, 쳐다보기조차 으리으리하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다. 누군가 아버지와 신은 공통적인 데가 있다는 말을 했다. 엄격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무섭게 응징하고, 명령한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거다.
예전의 아버지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
자식 앞에서 쌀가마를 번쩍번쩍 메어 나르는 걸 보여준다든가, 생명 있는 닭의 목을 비틀어 잡는다거나 마른 밭둑에 불을 지른다거나 거역하는 자식에게 매를 댄다거나 하는 것도 자신의 위엄을 지키려는 일종의 허풍이다. 아버지란 이런 허풍같은 권위를 내세우며 자식 앞에 군림한다. 그러면서 자식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며 신비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러나 이런 허풍의 오랜 반복은 마침내 아내를 성나게 한다.
"그 싱거운 소리 좀 하지 말어!"
이때부터 어린 자식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게 되고, 아버지의 권위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아버지의 하찮은 영웅본색이 드러나면서 자식의 눈길은 아버지가 아닌 더 위대한 남성을 집 바깥에서 찾기 시작한다. 시험 봤다 하면 전교에서 1등 했다는 말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아버지의 허풍은 다 우려먹은 산삼과 같이 초라해진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아버지의 허풍은 한낱 ‘싱거운 소리’일 뿐일까. 단연코 그렇지 않다. 4살 5살 되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허풍은 서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허풍에서 한 인간의 신성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그런 신성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이러면서 자식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풍부하게 소유하며 균형있게 성장한다. 이런 과정을 겪지 않고 자란 아이들은 인생의 희화적 재미를 모른다. 또한 자신의 내부에 숨은 초인적인 힘을 발현할 줄 모른다. 매우 현실적인 어른으로 성장해갈 게 뻔하다.
요즘 아이들은 신화적 요소가 배제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을 꾀는 여우도 없고,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는 호랑이도 없고, 뿔 난 도깨비도 없다. 물론 음험한 바위고개도, 늙은 느티나무도 없다. 이런 삭막한 도회는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할 여지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린다.
예전엔 마을마다 별나게 허풍을 떠는 이들이 있었다. 힘들게 일하다가도 그들의 허풍을 들으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찌 보면 허풍은 고단한 삶의 여백이다. 별 힘 없는 아버지의 허풍도 그런 점에서 유용하다.
"우리 아빠 어제 의자에 올라가 춤추다 의자 뿌아먹었어."
언젠가 골목길을 걸어오다 저들끼리 하는 어린 아이들의 말을 들었다.
"그때 엄마한테 아빠가 야단먹었지만 우리 아빠 알고보면 괜찮은 사람이다."
아이가 그 말을 덧붙였다.
허풍 떠는 아빠가 아이들에게 우습게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자식이 어려도 허풍 속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는다. 어리다고 아빠가 누구를 위해 의자에 올라가 춤을 추는지를 모를 리 없다.
허풍 떠는 사람을 무조건 싱거운 사람 취급하는 문화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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