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세상에 영원한 게 있을까요?

권영상 2012. 9. 3. 10:06

세상에 영원한 게 있을까요?

권 영 상

 

 

 

‘소월비 앞에서 아침 9시에 만난다.’

어제 종례 때, 나는 칠판에 큼직하게 내일 일정을 썼다. 일 년에 한두 번 학급별로 함께 하는 봉사활동이 있다. 이번 학기에는 아이들과 의논한 끝에 남산에서 하기로 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오는 아이들은 약속 시간 30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다. 36명이 다 모이자 소월비에 적힌 ‘산유화’를 외어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앉아서 또는 서서, 장난치면서 또는 친구들 어깨에 턱을 걸치고 걸으며 외었다. 그걸 다 외고는 밭은 남산 계단길을 올랐다.

 

가끔씩 보이는 휴지, 빈 캔, 담배꽁초를 주우며, 장난을 치며, 나뭇그늘에 쉬며, 이야기를 하며, 노래를 부르며 올랐다. 오래된 떡갈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어 아이들 얼굴에 얼비치는 가을이 참 예뻤다. 딱딱한 교실의자에 앉은 아이들 모습과 이런 막힘없는 공간에 나와 자연스럽게 어울릴 때의 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이런데 나와 이야기를 해보면 어른인 나보다 더 소소한 걸 많이 아는 애들도 있다.

 

“선생님,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있을까요?”

1학년치고 제법 어른스런 질문을 진영이가 했다. 진영이의 질문에 나보다 재빠른 아이들이 한 마디씩했다. 예술 작품, 산, 강물, 과학, 하늘, 별, 해, 진리, 파이, 삼각형의 정의, 스승과 제자, 63빌딩.....

아이들의 긴 대답이 끝났다.

“사랑도 영원해요.”

유별나게 키 큰 현성이가 엉뚱하게 그런다. 현성이 마음에 사랑이란 감정이 벌써 스며든 모양이다. 현성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직 사랑이 뭔지 말로만 아는 다른 애들이 참지 못하고 덤볐다.

 

 

사랑은 똥차처럼 냄새를 풍기는 거예요. 사랑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우리 엄마 같은 거예요. 사랑은 한 방에 가는 거라느니, 방울소리처럼 요란한 거라느니, ‘아침에는 사랑 저녁에는 이별’, ‘사랑하면 대담해져 담배도 피우게 한다.’, ‘사랑하면 오래 못 살아요.’....

꽤 오랫동안 아이들은 현성이 말과 다른 사랑론을 폈다. 어떤 녀석은, 자기 형은 맨날 사랑한다고 여친한테 메시지를 보내면서 뒤로는 쉴새없이 여친을 바꾼댔다. 그 말이 나오자, 또 너도 나도다. 자기 누나며, 이종형이며 옆집 형도 하나 같이 한 달마다 또는 일주일마다 ‘여친’ ‘남친’을 바꾼다 했다. 사랑이란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부도수표가 돼 있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남산 타워에 닿았다. 타워 앞에서 주운 것을 모아 버리고 났을 때다. 아이들 중의 누군가가 보여줄게 있다며 우리를 이끌었다. 그를 따라 근처의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우리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사뭇 놀랐다. 빙 둘러쳐진 펜스에 수없이 채워진 자물쇠들. 좋이 수천 개는 돼 보였다. 자물쇠엔 사랑을 약속하는 말들이 유성펜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일삼아 그걸 또 열심히 읽었다.

 

‘너 없으면 못사는 방희, 변치 않기.’, ‘수희 ♡ 종승 1주년! 늘 이대로.’, ‘민기랑 진아, 1년 됐어요. 10년 뒤에 우리 애기랑 셋이 같이 올게요.’, ‘우리 손 잡은 지 10일 되는 날 오래오래 사랑해요.’, ‘신영 짧게 말한다. 넌 평생 내꺼야. 사랑해.’, ‘우리 만난 지 960일째. 지금 마음 영원하길.’, ‘우리 5년 후에 여기서 만나. 7년 뒤에는 결혼해 쌍둥이 낳자.’.......

 

아이들과 함께 읽어본 사연은 대부분 사랑이 오래오래 변치 않기를 바라는 거였다. 처음 읽어갈 때는 단순히 재미나게 웃으며 읽었다. 그러나 거길 돌아나올 때는 뭔가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단순한 사랑의 멘트라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오래 붙잡아 보려는 허망한 욕심 같은 게 배어있어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게 사람의 삶이다.

그러나 주먹덩이보다 더 크고 견고한, 수천 개의 자물쇠로 채워놓는다 해도 변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 현성이는 이걸 보며 뭘 느꼈을까. 암만 해도 잘못 들어온 곳 같았다. 인간 삶의 또 다른 비애를 본 듯해 쓸쓸했다. 아이들이, 이 모습을 그저 하나의 코믹한 장면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며 조용히 돌아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