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지구를 탈출하다
권영상
드디어 제주로 간다.
이건 뭐 지구를 탈출하는 기분이다. 2박 3일 코스인데 마치 코로나가 결코 없는 혹성으로 이민을 가는 것 같다. 내가 살던 곳이여 안녕! 함께 울고 웃던 벗들이여, 친지들이여, 후배들이여, 안녕! 강아지 난나야. 창가에 크는 부켄베리아야, 혼자 가는 내가 미안하다. 부켄베리아 꽃그늘에 집을 둔 십자매야, 너희들 밥은 또 누가 챙겨주나.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이민은 안 되겠다 싶다.
나는 달뜬 마음을 한번 가다듬는다.
돌아보니 해마다 1월이면 제주에 갔다. 그런데도 갈 때마다 제주는 타국 같다. 안달루시아나 마드리드, 그것도 아니면 뭄바이, 또는 룩소르의 어느 붉은 야자수 사원이 있는 나라 같다. 남국이다. 남국 중에서도 수많은 오름을 거느린 오름의 제국이 제주다.
그곳에만 가면 꿈이 이루어질 것 같다. 막혔던 생각의 둑이 탁, 터져날 것 같고, 실없는 이념이 무너질 것 같고, 아픈 머리가 말끔해질 것 같다. 거기 가거든 서귀포 큰엉길 앞에 서서 남으로 남으로 펼쳐지는 그 끝 모를 대양을 보자. 그 대양 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반짝이는 겨울 햇빛을 보자. 보자, 보자, 실컷 가슴이 터지도록 보자.
나를 맞아줄 큰엉길 구실잣밤나무야, 먼나무야, 동백아, 제주산죽아! 잘 있느냐. 그들 발치에 세월에 순종하듯 피는 노랑 큰머위꽃을 만나거든 그 앞에 무릎 꿇고 꽃잎이 들려주는 겨울바람 이야기를 들어보자. 보랏빛 해국은 또 현무암 바위틈에 어떻게 기대어 어떻게 꽃 피는지, 새우란은 또 햇빛을 보듬어 안고 무얼 꿈꾸는지 보고 오자.
오름 중의 오름아, 다랑쉬오름아, 너를 보러 가마. 달처럼 둥근 다랑쉬야, 송당리야, 다랑쉬에 기대어 피는 시호꽃아, 섬잔대야, 가재쑥부쟁이야, 너들 모두 잘 있느냐. 보름달 뜨는 월랑봉의 보름달아. 행성 같이 다랑쉬오름을 맴도는 아끈다랑쉬오름아, 바람에 다친 상처는 없더냐. 사랑에 빠져 울지는 않았더냐. 거기 깃들어 사시는 천지신명께서는 안녕하시느냐.
가거든 새벽 같이 일어나 어쩌면 눈 내렸을지 모를 네 든든한 어깨 위에 오를란다. 거기 올라 맑고 푸르스름한 대양으로 솟는 아침 해를 볼란다. 그걸 보거든 지난 날 온갖 바라고 원하던 속엣것을 다 퍼내고 오직 빛나고 깨끗한 햇살만 가득 받아 안고 올란다.
그런 날 오후면 잠이 한숨 올 테지.
잠 한숨 자고 나면 모슬포로 가는 올레길을 천천히 걸어볼란다. 가급적 휴일을 피했으니 내가 가는 길은 외로울 만큼 한적하겠다. 이따금 늙은 제주 해송을 만나면 날은 춥더냐, 맵더냐, 살만은 하드냐, 아니냐. 인사를 좀 드려야겠다. 저쯤 구름 위에 장엄히 서 있는 한라산 산신께도 외로우신지 아닌지 문안 인사를 드려야겠다.
바다 건너편 문섬이며 범섬을 바라보며 걷는 것도 좋지만 그 길 끄트머리 동백나무 숲 저쪽 안에 깃든 카페. 바다를 향하여 앉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한가하게 마셔 볼란다. 커피야 어디서든 마시는 게 커피다. 번잡한 서울의 고층 카페든, 강변 어느 음식점에서든 마시는 게 커피지만 그게 모두 커피는 아니다.
길마다 길 맛이 다르듯 야자 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다보이는 대양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엔 붉은 동백꽃내가 난다. 푸른 대양이 일렁거린다. 그 집 하얀 테라스가 있는 뜰에 나와 하얀 철제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마시는 커피는 그래서 좋다.
지구를 탈출한 자의 자유를 본받고 싶다. 코로나야, 에비! 에비! 에비다.
<교차로 신문>2021년 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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