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이 떠나가다
권영상
서울에 올라가 1주일 만에 다시 안성으로 내려왔다.
그 사이 텃밭 감자가 꽃 피었고, 감나무 새 잎이 햇빛에 반짝인다. 지난주에 한창 피던 붓꽃을 다 보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그 사이 다 져버렸다.
고추가 제법 컸고, 토마토도 곁순을 따주며 지난 1주일간 비워둔 텃밭을 하루 종일 손봤다. 저녁 무렵 손을 씻고 집에 들어서는데 뭔가 동네 풍경이 좀 허전했다. 그것은 스치듯 슬쩍 지나가는 것이어서 밤이 되도록 그 허전함이 뭔지 깨우치지 못했다.
버릇처럼 새벽 4시경에 눈을 떴다. 한번 눈을 뜨면 다시 잠 들기 힘들어, 잠과 싸우느니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폈다. 새벽이 더 없이 고요하다. 책 몇 줄을 읽어가는 도중에야 그 허전함의 실체가 불현 떠올랐다. 수탉 울음이다.
이 즈음이면 건너편 꼬끼오집 수탉이 운다. 울어도 지금이면 몇 번을 울 때다. 새벽 3시부터 우는 게 보통인데 4시가 다 되도록 기척이 없다. 동네가 모르게 조용히 울고 말 수탉이 아니다. 몸집이 커가면서 나날이 목청도 커갔다. 그런 그의 울음소리를 내가 못 들을까.
수탉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울었다. 새벽부터 울기 시작해 한낮은 물론이요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때까지 울었다. 꼬끼오집 마당에서만 우는 게 아니다. 그는 암탉들을 데리고 요 앞뜰을 헤집어 다니며 먹고 놀고 하면서 온종일 울었다.
산과 산 사이에 꼬끼오집이 있는지라 울음소리가 그 반향으로 하여 마을을 울렸다. 새벽엔 목청이 더욱 컸다. 그가 그렇게 목 놓아 우는 까닭은 산 너머에서 아련히 맞대응해 오는 두어 마리 수탉 울음소리 때문이다. 수탉은 제 울음이 거기 가 닿게 하려고 새벽이 소란하도록 거칠게 울었다. 그 거대하고 통 큰 목청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가끔 제 집 마당에 나와 우는 수탉을 보면 목을 쭉 빼어 붉은 볏이 흔들리도록 울었다.
“이 놈의 달그 새끼 시끄럽게 왜 울어! 왜! 왜!”
꼬끼오집 남자 주인은 주변에 사는 우리가 미안한지 가끔 회초리를 들고 수탉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그게 자신의 울음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수탉은 마당을 뛰쳐나와서도 길길이 소리치며 울었다. 일종의 분노거나 저항쯤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본능이든가.
나는 수탉의 그 담대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안 된 말로, 저것이 제 수명을 재촉하는 비명일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경이 좀 과한 옆집 할머니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우는 수탉소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꼬끼오집을 찾아갔던 모양이다.
“저 집 할머니 어떤 분이지요?”
텃밭에 물을 주는 데 그 꼬끼오집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기는 처음인 분이다. 그가 턱으로 할머니 집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저희 집에 찾아와 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네요, 그랬다. 닭 울고 개 짖고 해야 시골 맛이 나지요 뭐. 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그 순간, 수탉에게 올 것이 왔다는 직감을 했다.
1주일, 서울에 가 머물다 돌아온 사이 수탉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허전했다. 하루종일 이 작은 마을을 울음소리로 지배하던 수탉이 갔다. 지나칠 만큼 담대하고 요란한 울음소리 때문에 수탉의 운명도 끝내 불행해지고 말았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수탉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놓고 갔다. 실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자고 운 것이 아니었는데 결국은 불편을 준 꼴이 되었다. 이 동네에 수평아리로 찾아와 6개월을 간신히 살고, 한창 젊은 나이에 수탉은 떠났다.
<교차로신문> 2021년 6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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