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모내기를 앞둔 무논 풍경

권영상 2021. 5. 6. 19:15

모내기를 앞둔 무논 풍경

권영상

 

 

“쑥 캐러갑시다!”

아내가 또 나를 꼬드긴다.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이미 보름 전에 한 차례 들에 나가 적당히 쑥을 캐었는데 또 쑥이라니! 나이 먹은 사내가 쑥 캔답시고 들로 나다니는 모양이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아내는 아내대로 집에 갇혀 지내는 일이 갑갑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돌아섰다.

그럼, 나 혼자 나간다. 하더니 얼마쯤에 보니 정말 나가고 없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가 나중에 무슨 구설을 들을까 싶어 하던 일을 놓고 집을 나섰다. 보나마나 혼자라면 인가가 있는 쪽일 것 같아 그 쪽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 근처 공터에 아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아내와 논벌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섰다.

모내기가 다가오는 시기라 논마다 가득가득 물을 대어 놓았다. 좀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5월 무논의 풍경이 멋있다. 물빛이 호수같이 맑고 논물이 햇빛에 번쩍인다. 무논 풍경에 이끌려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내려와 보니 보인다. 논둑을 고치는 분도 있고, 무논을 갈기 위해 제초기로 논둑 풀을 베어 논으로 밀어넣는 분도 있다.

논 주인에게 다가가 논둑 쑥을 캐고 싶다고 했다. 그분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 일대 논은 모두 유기농을 하기 때문에 농약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다.

 

 

물을 먹어 그런지 논둑 쑥은 척 보기에도 살이 쪘다. 진한 초록에다 튼실하기까지 하다. 아내와 논둑에 앉아 보기좋게 자란 쑥을 캤다. 쑥 냄새가 푸슥푸슥 코끝에 닿는다. 주인의 승낙까지 받았겠다, 서두를 것도 없다. 쑥을 캐다말고 고들빼기 노랗게 꽃 피는 논둑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눈앞에 펼쳐진 판판한 무논을 바라본다. 건너편 산과 그 위의 흰 구름이 물 위에 깊숙이 내려와 있다. 산 중턱 집들과 연둣빛 새 잎이 피는 마을 나무들도 물속에 들어와 반짝인다. 길갓집은 창고를 덧붙이는지 지붕에 서까래를 얹는다. 반 팔 티셔츠 차림의 남자 둘이 뚝딱뚝딱 못질하는 소리가 물속에서 울려나온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치 맑은 세상을 보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빨간 오토바이 한대가 무논을 따라 저쪽 조비산 쪽으로 간다. 나는 오토바이가 달려가는 그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쑥 캐시느라고!”

이 쪽 등 뒤에서 누가 내게 말을 건다. 할아버지 한 분이다. 내가 앉아 있는 논둑길 끝에 앉으신다. 나는 일어나 그분 옆에 가 나란히 앉는다. 그분이 내게 물었다. 어디 사느냐고. 나는 언덕 너머 밤고개에 산다고 했다. 아, 밤고개! 거기 당신 사촌이 산다며 그분이 눈앞에 보이는 논 이야기를 하셨다. 논은 2천 평, 알고 보니 논 주인이시고, 풀을 베는 이는 그분의 아들이다. 모 낼 때가 다가오는 걸 몸이 먼저 알아 나오셨다고 했다.

한참 만에 아내가 쑥 가방을 들고 논둑에서 나왔다. 나는 가벼이 인사를 나누고 아내와 큰길을 걸었다. 쑥이 한 가방이다. 제법 묵직하다.

 

 

가끔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도 아내와 한가히 들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속잎 피는 밤나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기온이 걷기에 마침맞고, 마음이 공기처럼 가볍다. 무엇보다 아내와 걸음을 맞추어 걷는 이 봄길이 좋다. 어쩌면 아내가 이런 시간을 가지고 싶어 쑥 타령을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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