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개쪽 줍니다

권영상 2021. 4. 19. 20:19

 

개쪽 줍니다

권영상

 

 

아내가 옷장에서 옷을 꺼내 봄옷 정리를 한다. 언뜻 내 눈에 띄는 바지가 있다. 오래 전, 직장에 다닐 때 즐겨 입던 베이지색 면바지이다. 그걸 집어들고 나와 예전에 하듯 다리미로 바지를 다렸다. 바지통이 넓긴 해도 옛 옷의 정취가 있다. 다린 바지를 입고 놀이터 쌈지 도서관을 찾았다.

휴일 오후라 아이들이 많이 나왔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램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틱 낫한 스님의 ‘내 마음의 샘물’이다. 봄볕에 책을 펴고 한 장 한 장 읽어가고 있을 때다.

“아저씨, 축구선수 한 명이 모자라 그러는데…….”

초등학교 3학년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내 앞에 와 섰다.

“다섯 명이 하는 축구라 꿀잼 있어요.”

함께 온 노란 바지 사내아이가 꿀잼이라는 말로 나를 유혹한다.

나는 제 자리에 책을 꽂아놓고 달려 나가 노란 바지 편이 되어주었다. 어리다고 만만히 볼 축구가 아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꿀잼 있게 뛰고 달리는 데 나는 애들을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숨찼다. 우리 팀이 자꾸 지자, 나에 대한 실망이 커 보였다. 나는 자진해 쫓겨나듯 밀려나왔다. 나와서도 그들을 한참이나 응원하다 슬그머니 동네길로 들어섰다.

 

 

그 나이 때엔 축구도 꿀잼일 테고, 물구나무서기도 꿀잼일 테다.

길 모퉁이 끝에 편의점이 있다. 콜라 한 캔을 샀다. 그걸 마시며 편의점을 나와 막 돌아설 때다. 편의점 벽에 큼직한 종이 한 장이 붙어있다.

“여기다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꼬리 잡히면 개쪽 줍니다. 점주.”

누군가의 무단히 버리는 쓰레기가 편의점 주인을 성가시게 하는 모양이다. 내용이 그러한데도 나는 싱긋이 웃었다. ‘개쪽 줍니다’ 는 말이 재미있어서다. ‘개쪽 준다’는 엄청 쪽 팔리게 해주겠다는 조어다. ‘쪽 팔린다’는 비속하게 느껴지지만 ‘개쪽 준다’는 왠지 이 말을 부리는 주인의 격한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 좀 얌전한, 그런대로 교양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속한 조어인데도 나름대로 편의점 주인의 인성이랄까 그런 게 묻어난다.

 

 

언젠가 동네 꽃가게에 부랴부랴 딸아이의 생일 꽃을 사러갔을 때다. 하필 가게 문이 잠겨있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내 눈에 문에 붙은 메모지가 보였다.

“지금은 신혼여행 중입니다.”

그때 나는 꽃을 사지 못했지만 그 글에 반해 웃음 지으며 돌아왔다. 지금 신혼여행 중에 있을 꽃집 아가씨를 떠올리자, 덩달아 나도 행복해졌다.

직장 근처에 있는,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낙서도 한 동안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때 나는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한길이 내다보이는 막다른 담장 벽에서 이런 낙서를 보았다.

 

 

“너를 생각하며 돌아선다. 가현2”

학생이 한 낙서 같았다.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가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서는 ‘가현2’는 누구일까. 막다른 담벼락에 조용히 글을 남기고 돌아갔을 그의 마음이 찡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게 낙서이긴 해도 그 글을 읽는 순간 갑자기 골목길을 걸어가는 그 동네 젊은 학생 애들이 멋있어 보였다.

으름장을 놓는 경고문이든, 휴업을 알리는 안내문이든, 실연의 낙서든 거기엔 분명히 그 글을 쓴 사람의 성품이 나타난다. 좋은 글이란 따스한 기억으로 오래 남는다.

 

교차로 신문 2021년 4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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