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주 추천]권영상/그림자(시와 소금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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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상
그림자가 돌아왔다.
어디서 무슨 장난을 쳤는지 납작해진 몸으로 왔다.
예쁘게 입혀놓은 옷은 헐벗은 누구에게 또 벗어주었는지
검정 옷을 걸쳤다.
그러고도 늘 낮은 곳이 그의 자리다.
―《시와소금》, 2020년 여름호
시 읽기
권영상의 시를 읽으면 감탄한다. ‘어떻게 요런 생각을…’. 늘 시인만의 새로운 생각을 만난다. 시인은 마치 아무도 가보지 않은, 아무도 모르는 생각 마을로 가는 비밀 열차 티켓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가끔 샘이 난다. 시인은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는 익숙한 사물을 입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왜 납작한지, 왜 늘 검정 색인지, 왜 낮은 곳에 머무는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권영상 시인은 아니다. 왜? 그는 가슴 속에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동시인이니까. 시인은 호기심을 갖고 따뜻한 눈길로 그림자를 찬찬히 오래오래 마주한다. 그래서 친구가 된다. 그림자는 시인에게 마침내 꼭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비밀을 소곤소곤 들려준다. 하지만 아니다. 권영상 시인의 그림자는 애초부터 우리 그림자와는 달랐다. 시인의 그림자는 평평한 1차원의 모습이 아니라 입체적인 몸이다. 시인의 그림자는 색색의 예쁜 옷을 입는다. 무엇보다 시인의 그림자는 아주 심한 장난꾸러기다. 그 그림자가 어딘가로 떠났다 돌아왔다. 그런데 어디서 무슨 장난을 치고 왔는지 몸이 납작해져 온 것이다. 입혀놓은 예쁜 옷은 헐벗은 누구에게 또 벗어주었는지 검정 옷을 걸치고 돌아왔다. 그런 일이 이번만이 아니다. 그러고도 늘 낮은 곳이 그림자의 자리다. 장난꾸러기지만 심성이 착한 그리고 한없이 겸손하기도 한 권영상 시인의 그림자. 꼬마 도깨비만큼이나 친근감 있고 재미있는 시인의 이런 동시는, 멀어져 가는 어린 독자들과 시의 거리를 좁혀주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