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속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권영상 2018. 6. 30. 11:16



속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권영상



당신, 나는 당신 없는 밤을 살아왔네요. 이 넓은 세상을 외로이 건넌다는 건 힘들지요. 건너편 참나무 숲 새들도 반응 없는 울음을 울며 밤을 지새고 있네요. 컴컴한 숲이 내려다보고 있는 밤은 무섭지요. 혼자 그걸 견디며 맞는 밤은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도 홀로 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내게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당신을 보리라는 기대감. 그래요. 당신은 종종 나를 떠나지만 어김없이 돌아오기도 잘 하지요. 나는 그런, 얼마간의 거리를 사랑하는 당신이 좋지요. 당신은 우리가 사는 이 별을 떠나 먼 우주를 떠돌다가 서로가 간절히 그리울 때 나타나 주곤했지요.



나는 당신을 통해 그리움이란 걸 배우지요.

혼자 밤을 새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움을 미워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알지요. 내가 익힌 그리움은 내가 되고 내 인생이 되고, 사랑이 되고, 때로는 폭삭 무너져 먼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그리움이며 나의 절망인 셈이지요.



오늘, 당신은 내게로 돌아온다는 기별을 주었네요.

당신이 오신다는 밤 9시. 당신은 낮보다 확실히 밤을 좋아하지요. 초저녁보다는 좀은 이슥한 밤. 가급적 여럿이 아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단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좋아하지요. 나는 방안의 불이란 불을 모두 끄고 뜰마당에 나와 당신을 기다리지요.

당신 오는 밤 9시의 기척이 보입니다. 그곳 하늘이 우련하게 물듭니다. 당신은 붉거나 희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한 빛의 기척으로 오지요. 나는 가슴이 뜁니다. 울렁거리기도 하고 방망이질치듯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드디어 참나무 숲을 열고 당신이 얼굴을 드러내는군요. 크고 둥그런, 상기된 얼굴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를 원했는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달려와 부드러운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네요. 당신이 나를 어루만지면 나는 금방 당신의 빛깔로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원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당신과 한 몸이 되는 일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오, 당신이여!”

나는 속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당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쳐 부른다 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지요. 그걸 아는 나는 언제나 속으로, 간절히, 내 소망을 실어 당신을 부르지요. 가끔 이슥한 밤 창문을 열다가, 또는 도심의 어느 빌딩을 돌아나오다가 당신을 만나면 나는 당신을 부르면서 당신에게 내 소망을 잠깐 의뢰해 보는 오랜 습관이 있지요.



내가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거나 무언가가 부러워 한숨을 지을 때, 또는 상심에 빠질 때 내가 당신을 찾는다는 건 당신도 잘 알지요. 당신이 내게 무얼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때마다 당신에게서 위로와 위안을 느꼈지요.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당신만큼 나를 편안케 해주는 이도 없을 듯 합니다. 호화로운 집을 사주고, 차를 사주고, 호사스런 삶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당신 같을까요. 당신은 한결 같지요. 한결같이 나를 찾아오고, 한결 같은 거리에서 나를 지켜보아 주지요.



당신은 벌써 참나무 숲 위로 훌쩍 날아올랐네요. 그러나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길만은 변함 없습니다. 당신이 있는 한 나는 이 긴 밤을 보낼 자신이 또 생깁니다. 당신은 내가 잠든 동안에도 나를 지켜줄 테니까요. 먼 밤길 조심조심 건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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