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권영상 2018. 7. 9. 12:57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권영상

    

 


지난해 칸나 심었던 자리에 올해 글라디올러스를 심었다. 네 뿌리.

창문을 열면 한 눈에 얼른 볼 수 있는 곳, 마당 한가운데가 그들 집이다. 꽃이 한창이다. 잘 큰 칸나만큼이야 못하지만 흐드러지게 피는 꽃은 유별나다. 꽃에서 발칙한 여인의 화장품 냄새가 난다. 유혹적이다. 글라디올러스는 비를 좋아한다. 장맛비에도 망설이지 않고 꽃타래처럼 꽃줄기를 감아 올라가며 핀다. 그래서 더욱 유별나다.

글라디올러스 잎줄기가 자라는 걸 봄부터 쭉 보아왔다. 글래디에이터의 검처럼 날카롭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슬람의 칼처럼 예리하게 휘어있다.



글라디올러스가 그렇게 자랄 때 한쪽 뜰에서는 작약이 지고 있었다. 작약은 거의 한 달을 나와 함께 했다. 굳이 모란과 비교하자면 작약은 빈자를 위한 아름다운 꽃이다. 곱지만 어딘가 빈한한 구석을 숨기지 못한다. 꽃의 색상과 구조가 그렇다. 그러나 작약의 꽃에 쏟는 열정과 집중은 가히 놀랍다. 없는 집 살림에 좋은 옷 한 벌을 사면 몇 달을 고생하듯 작약도 꽃에 쏟는 비용이 만만찮다. 한번 잘 피고나면 이듬해는 그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꽃다운 꽃을 피우지 못한다. 작약은 그런 꽃이다. 한번을 피어도 꽃답게 핀다.



작약이 가고 글라디올러스 꽃대가 통통해질 무렵 뜰안에 해바라기가 왔다. 누군가가 가면 누군가가 온다. 어쩌면 누군가를 맞기 위해 누군가가 자리를 내주는지도 모른다. 뜰안에 꽃이 피고 지는 걸 보면서 이제야 그 이치를 안다. 꽃 지는 일이 안타깝지만 새로 피는 꽃과 마주하면 그 아픔도 잠시. 금방 옛것을 잊는다. 옛것엔 옛것에 맞는 영화가 있었다. 옛것을 잊어야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꽃은 쉬지 않고 새로 피는데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옛것에 매어있다면 우리의 머리는 헝클어진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해바라기만큼 정밀하거나 늠름한 꽃도 없다. 해바라기는 기하학적이다. 꽃판 테두리를 따라 노란 꽃이파리를 배치한다. 규칙적으로 배치된 꽃판의 꽃씨 하나하나마다 작고 정밀한 노랑꽃을 또 피운다. 벌이나 나비를 불러들여 단 한번에 그 많은 씨앗들을 수분할 요량을 갖고 있다. 상추밭이나 고추밭 가장자리에 여름의 이정표처럼 서 있는 해바라기는 늠름하다. 폭염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인을 닮았다.



이 무렵에 피는 꽃으로 백합이 있다. 몇 해 전 두 뿌리 구해 심었는데 그게 제 스스로 네 뿌리로 여덟 뿌리로 개체가 불어났다. 꾸준히 웃거름을 한 덕분이지 싶다. 백합은 노지에서 월동한다. 노지에서 월동하는 꽃일수록 더욱 향기롭다. 수선화가 그렇고 백합이 그렇다. 한두 뿌리만 심어놓아도 뜰안이 향기롭다. 달뜨는 밤의 백합 향기는 더욱 그렇다.

백합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다.



비로소 뜰마당에서 글라디올러스가 피기 시작한다. 유혹적이다. 블라우스 단추가 하나쯤 풀린, 미의 경계를 슬쩍 넘어서 있는 꽃이다. 글래디에이터 막시무스의 검 끝에서 핏방울처럼 피어나는 글라디올러스는 아름답지만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다. 검투사의 눈물을 원하듯 세차게 내리는 비를 원한다. 일일이 지주대를 세워준다. 사랑이 그렇듯 혼자 힘으로 꽃 피울 수 없다.



글라디올러스의 한때가 오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배롱나무꽃이 있다. 새로난 가지마다 꽃눈이 불어 통통하다. 배롱나무가 또 꽃 피기 시작하면 나는 배롱나무꽃의 품위와 품격과 당당함에 압도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꽃이란 예쁘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곱다. 그들의 한때는 그렇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들도 물러나야 한다. 사람의 삶은 뭐 안 그렇겠는가. 물러날 줄 아는 것도 참 아름다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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