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골목 방귀

권영상 2017. 6. 9. 13:51

골목 방귀

권영상

 

 


그 사람 얼굴은 잊었지만 쑥스러워하던 그의 목인사만은 잊을 수 없다. 제법 호젓한 마을 안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다. 난데없이 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방귀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쯤 앞서 가는 사내가 있다. 그도 자신의 방귀소리에 놀랐는지 흘끔 돌아다 봤다. 그의 얼굴에 짤막한 웃음이 돌았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감추었다. 60대는 되었을까.



나는 우군을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길 위엔 그와 나뿐, 비로소 그가 웃은 까닭을 알았다. 발뺌할 여지없이 방귀 뀐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 같았다. 지나가는 강아지라도 있다면 강아지 쟤가 뀌었어, 나무라도 한 그루 서 있다면 나무 쟤가 뀌었어, 하고 밀어부칠 테지만 그도 저도 아닌 상황이다. 소리라도 작다면 돌멩이가 구르며 뀌었어, 개미가 뀌었어, 하겠지만 그의 방귀는 골목 안이 잠깐이나마 붕 떠오를 만큼 세었다.



그가 야속했다. 그의 엉덩짝 뒤를 따라가는 나를 확 무시하는 기분이었다. 방귀란 허물없는 사람끼리 둘러앉아 허물없이 뀌어 친밀감이나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다. 그런 관계가 아닌 이상 오히려 긴장감 때문에 뀔 수 없는게 방귀다. 그런데도 배짱좋게 뀌었다면 그건 상대를 무시하는 그의 인간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내가 그를 야속히 여기는 까닭이 그거다. 나를 투명인류로 보았거나 전봇대거나 돌부리거나 길짐승 정도로 무시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에잇, 싱거운 자!”

나는 그가 들으라고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며 손으로 방귀 냄새를 날리는 시늉을 했다. 그와 나의 거리는 10여 미터. 그의 방귀 위력이 암만 세다 해도 개방된 이 길에서 내 코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내 코는 구린내를 느꼈고, 나는 푸우, 막힌 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골목길 공기들이 방귀 냄새를 모아모아 내 코 앞에 던졌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의 방귀가 좀 똑별나 내풍기기 보다 쏘는 위력을 가졌든가.



나는 점점 심해지는 구린내를 피하려 걸음을 늦추었고, 사내는 일말의 송구함 때문인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더니 휙 골목 안으로 몸을 감추며 나를 힐끗 돌아다봤다. 그가 내게 꾸벅 목례를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나준 골목이 고마워 골목한테 하는 건지 내게 하는 건지 분명 그는 꾸벅, 머리를 숙여보였다. 이 방귀의 국면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하늘에 대한 감사였을까. 어쨌든 그가 사라지면서 방귀냄새도 사라졌다.



그 이후다.

그가 남기고 간 고귀한 교훈 때문일까. 길을 가다 어찌어찌된 일로 문득 몸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어하는 방귀를 느낄 때가 있다. 그때면 나는 슬쩍, 아니 갑작스럽게 뒤돌아볼 일이나 있는 것처럼 뒤를 살핀다. 20여미터 둘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면 마음놓고 그 배출의 과업을 치룬다. 그럴 때의 그 방사의 기쁨이란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 천근만근의 몸이 일순 날아오를 듯 가벼워지고, 걸음이 빨라지고, 몸안이 마치 샘곁을 지나온 것처럼 맑고 푸르러진다.



그러고 나면 나는 그때 그 사내처럼 꾸벅 목례를 한다. 내 한 몸 기뻐지기 위해 몹쓸소리를 들어낸 모든 중생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가끔 길을 가다 보면 슬그머니 사위를 살피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 또한 방사의 기쁨을 준비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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