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지붕집 할머니
권영상
집에서 수레가 다니는 동네 농로로 내려섰지요. 쭉 가면 논벌이 나오는 벽장골입니다. 그때가 추석이 가까운 무렵이었습니다. 벼가 한창 익고 있을 벽장골을 보러가는 길이었지요. 우리집에서 보자면 길 건너 파란지붕집 앞을 지날 때입니다.
“이리 잠깐 들어와 봐요.”
파란지붕집 반쯤 열린 대문 안에서 그 댁 할머니가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인사도 드릴 겸 대문 안에 들어섰지요. 정갈하게 가꾸신 할머니네 뜰안 텃밭에 배추가 벌써 채곡채곡 알이 들고 있었지요.
“대추를 좀 털었어. 맛이나 보라고.”
할머니께서 마루에 놓인 검정 비닐봉지를 건네십니다.
속이 차서 윤이 반들반들한, 잘 영근 대춥니다. 맛이나 보라고 주시는 양치고 적잖습니다. 나는 뭐 이렇게 귀한 걸 제게까지 주시냐고 인사를 드리고 받았지요. 마당을 나올 때에 보니 담장 곁에 서 있는 대추나무가 대추를 턴 뒤라 꺼칠합니다.
가던 길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추석 무렵 이 귀하디귀한 것을 낯설다면 낯선 내게까지 주시는 할머니가 고맙습니다. 집안에서 조용히 나를 부르신 것도 어쩌면 이웃들의 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분들에게 못 드리는 것을 내가 받았으니 고마울 밖에요.
여기 밤골에 들어와 가끔씩 머물다 가는 일이 이제 이태가 됐습니다. 몇 집 안 되는 이 마을에 내려와 처음 뵌 분이 파란지붕집 할머니입니다. 비녀를 지른 쪽머리에, 하시는 말씀이 따뜻했습니다. 집이 춥지 않느냐? 밥 해 자시는 건 힘들지 않느냐. 여기 사람 못잖게 부지런하다며 나를 뵐 때면 꼭 한 말씀씩 해주셨지요.
마을에서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통로는 없습니다. 있다면 바위를 쌓아올린 사이로 나나 오르내리는 길인데 언젠가 할머니께서 무 한 덩이를 주시러 그길을 오르실 때입니다. 그때 나는 우리집 주인으로서 할머니를 위해 손을 내밀어드렸지요.
“여기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셨고, 혼자 힘으로 그 바위 사이로 올라오셨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몸으로, 허리를 편하게 펴지 못하시는 몸으로 올라와 무를 주고 가셨지요. 비록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외간남자인 내 손을 사양하실 만큼 할머니는 사려심이 각별했습니다. 답례로 무얼 드리면 그게 처음인 것처럼 또 보답을 하시지요.
요 며칠 전입니다. 음성에 사는 조카 내외가 찾아왔는데 갑자기 대접할 것이 없어 망설일 때입니다. 집 앞 길을 지나가시던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셨지요.
“늙은이가 만들어 어떨지 모르겠지만 좀 자셔보라고.”
할머니가 쥐어주고 가신 건 접시에 담긴 쑥떡이었지요. 봄햇쑥을 빻아 만들었다는 쑥 절편이요. 쑥떡 쑥떡 하지만 흔히 먹던 그런 쑥떡이 아니고, 봄쑥이 꽉 찬 쑥찰떡 절편이었습니다.
접시 돌려드릴 걸 생각하며 그 사정을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에게 말했지요. 할머니 좋아하시는 케익을 사드리라는 겁니다. 나는 시장에 나가 케익을 사고 심심할 때 자시라고 뻥튀기도 한 봉지 샀습니다. 내일쯤 아내 곁으로 가기 전에 드려야겠습니다. 좀 설레네요. 고향 어머니를 뵈러 갈 때의 기분이 이랬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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