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행복한 두더지 퇴치법

권영상 2017. 4. 28. 13:43





행복한 두더지 퇴치법

권영상



시금치 밭에 두더지가 들어왔다. 두더지 들락거린 구멍이 시금치 골에 숭숭 뚫려있다. 나는 벽에 세워둔 고추 지주대를 집어 구멍 속을 쿡, 찔렀다. 쑥, 들어간다. 또 찔렀다. 지주대가 물컹 들어갈 뿐 두더지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내 발소리에 두더지가 달아나도 벌써 십 리는 달아났겠다.

시금치 심은 이랑이라 해봐야 네 이랑, 누가 본다면 부끄러울 만큼 작은 밭이다. 작은 밭이어도 이랑 밑을 파고들어 멀쩡한 시금치를 말라죽게 만드는 건 그냥 보아넘기기 어렵다 이게 처음이라면 말도 안 한다.



두더지가 처음 텃밭에 나타난 건 지난 초겨울이다. 그때 이 시금치밭은 쪽파밭이었다. 김장에 쓸 요량으로 쪽파를 금이야 옥이야 가꾸어 나가던 중이었다. 김을 매주는 내 발 앞에 조그마한 검정 실뭉치가 나타났다. 나는 이 난데없는 물건에 기겁을 했다. 알고보니 앙증맞은 두더지였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보니 두더지란 놈 털빛이 기름을 먹인 듯 자르르 하다.

“여, 반갑구나! 오랜 친구!”

작은 두더지가 느닷없이 귀엽게 느껴졌다. 요 재미난 녀석! 요 귀여운 녀석! 하며 들여다보는 사이 두더지는 흙속으로 깜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손안의 보물을 놓친 것처럼 섭섭히 두더지 사라진 곳을 살폈지만 이미 어두운 땅속으로 숨어든 뒤였다.



옛날, 고향에서 살 때 아버지가 가끔 두더지를 붙잡아 뽕나무 가지에 매달아놓은 걸 본 이후, 두더지를 본 게 처음이었다. 그 옛날의 고향 흙친구처럼 두더지가 반가웠다. 그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오랜 친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옛 친구인 줄 알고 놓아준 두더지가 그 후부터 걸핏하면 텃밭에 나타나 행패를 부렸다. 며칠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어느 날 텃밭에 나가봤더니 쪽파가 다 말라 죽었다. 하필이면 쪽파 이랑만 골라 땅을 뚫고 다녔다. 잘 크던 쪽파밭은 그렇게 해 다 망가졌다. 삽으로 쪽파밭을 파 뒤집으며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두더지가 돌아다닌 길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땅속이 아예 두더지 다닌 길로 텅 비어있었다.



“이놈들 잡혀만 봐라!”

그렇게 소리치고 보니 예전, 아버지가 왜 두더지를 붙잡아 나뭇가지에 걸어놓으셨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오죽 미웠으면 그러셨을까.



나는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열고 두더지 퇴치법을 검색을 했다. 바람개비를 만들어 두더지 굴에 세우면 바람개비 돌아가는 진동소리에 놀라 못 온단다. 생선대가리를 길목에 묻어두면 비린내가 싫어 못 오고, 쇠를 두드려 쇳소리를 내주면 그 소리가 무서워 또 못 온단다. 세상에, 이렇게나 재미난 퇴치법이 있다니! 나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바람개비를 만들기 위해 플라스틱 파일을 찾았다. 그 정도로 상대를 퇴치할 수 있다면 굳이 서로 극악하게 싸울 일이 없다. 세상 일의 갈등해결 방법이 이쯤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의 목숨을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이 방식이야말로 행복한 해결법이 아닐 수 없다. 두더지 퇴치법처럼 다들 좀 현명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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