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봄은 기회를 엿본다

권영상 2017. 4. 25. 18:24

봄은 기회를 엿본다

권영상




오후에 비 온댔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심상찮습니다. 모종삽과 세수대야를 들고 꽃모종을 키운 모판으로 갑니다. 모판엔 지난해에도 키웠던 프렌치 메리골드, 백일홍, 과꽃, 해바라기가 알맞게 자랐습니다. 모종을 낼 요량으로 요 며칠 전부터 밤이면 비닐을 벗겨 적응력도 키웠습니다.

비 오기 전에 울타리 삼아 밭 가장자리에 쭉 돌아가며 심고, 꽃밭에 무덕무덕 내거나 마당 한 가운데에 엉뚱하게 만들어놓은 꽃밭에 심어야 합니다.



첫해에 꽃모종을 심을 땐 애기 다루듯 뿌리 하나 다칠까 호호 불며 심었지요. 근데 자꾸 자꾸 심어보면서 터득한 게 있습니다. 어떻게 심든 땅에 뿌리만 닿게 하면 다 살아난다는 거였습니다. 어린 생명을 대지에 맡기는 만큼 대지는 맡은 바 임무를 다 할 걸 믿습니다. 대지에 뿌리를 댄 생명은 또 제 목숨값을 하느라 어떻든지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테지요. 이게 대지와 그 위에 눌러사는 생명과의 관계입니다. 외아들 보살피듯 호호 불며 모종을 내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 힘을 써주는 일이 꽃모종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봄은 파종과 모종의 계절이지요.

손바닥만한 제 텃밭을 한번 들여다 볼까요? 제일 먼저 꽃씨와 상추씨 온상을 하였지요. 감자씨를 밭에 내고, 이어 토란을 심었네요. 지난해에 키운 1년생 도라지를 본밭에 옮겨심었습니다. 공들여 발아시킨 대파 모종을 내었지요. 근대씨와 홍당무, 강낭콩씨를 넣었습니다. 이 꽃모종을 끝내면 상추 쑥갓 모종을 내야합니다.



봄에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건 봄이야말로 기회의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파종의 순간을 놓치면 결실의 기회도 잃는다는 뜻입니다. 천기를 내다보며 모종낼 날을 엿보는 농부의 심정을 알만 합니다. 같은 모종이라도 아침에 내는 것과 저녁에 내는 것과의 차이는 오래도록 눈에 띄지요.



그 일이 어찌 모종만이겠나요?

사람도 인생의 봄을 맞으면 세상에 나가 일가를 이루며 삽니다. 그러자면 제 나이 무렵의 동료들과 서로 힘을 겨루어야 합니다. 그쯤에는 글버딛는 청춘의 힘이 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제가 가진 힘 이상을 써도 행복합니다. 근데 요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학교를 마치고도 자리를 잡지 못해 저렇게 한 해 두 해 뒤로 쳐지니 본인도 그렇지만 지켜보는 이들 마음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청년들이란 모종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조건만 갖추어주면 살아내기 마련인데, 그 적당한 자리마져 없으니 고민이 큽니다.



꽃모종은 한나절만에 마쳤습니다. 이제 저들은 제 인생의 화려한 한때를 위해 있는 힘껏 제힘을 발산할 것입니다. 해마다 꽃모종을 내는 까닭은 꽃들의 화양연화를 보기 위해서이지요. 모든 목숨들에겐 그들만의 화양연화, 좋은 한때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것은 이루어내는 행복 못지 않게 지켜보는 행복도 큽니다.

꽃모종을 다 했으니 밥솥에 쌀을 안쳐야겠습니다. 밥이 되는 동안 상추 모종을 부지런히 내야겠어요. 그러고 나면 알맞추어 하늘이 비를 내려줄 터이지요. 봄이 중반의 고비를 넘습니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란 지붕집 할머니  (0) 2017.05.05
행복한 두더지 퇴치법  (0) 2017.04.28
초행길  (0) 2017.04.21
예전에 살던 집  (0) 2017.04.19
4월, 그 노래  (0) 2017.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