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어이넘어고개와 느티나무 굴헝

권영상 2017. 1. 13. 17:32

어이넘어고개와 느티나무 굴헝

권영상

 

 


고향 이야기입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고개가 있었지요. 이름하여 어이넘어고개. 고개가 사뭇 높고 으슥했지요. 또 고개 주변엔 도티끝산(멧돼지산)도 있고, 호랑이굴도 있었으니 그 옛날, 그 고개를 넘는 일은 정말 어이 넘을까, 하고 푸념을 할만 합니다.



어이넘어고개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이기도 했지요. 나라를 잃었을 때 마을 장정들은 까닭 없이 징용되어 이 고개를 넘어갔고, 남북이 싸울 적에도 이 고개를 넘어 또 위태한 싸움터로 갔지요.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을 청년들은 그 낯선 전장터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 고개를 넘었지요.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그리워질 때면 어머니들은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 이 고개에 나와 오지 않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렸겠지요. 그걸 내가 지금 자세히 알 까닭이야 없지만 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지요.

어머니가 읍내 장에 가셔서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으실 때면 나는 여기 이 어이넘어고개에 와 어머니를 기다렸지요. 별이 뜨고, 컴컴한 산 위에 달이 뜰 때까지 빈 함지박을 이고 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렸지요. 



이 고개를 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지요. 고개 저편 길목에 있는 느티나무 굴헝입니다. 거기엔 커다란 개굴창이 있고, 그 둘레엔 아주 오래된 늙은 느티나무 고목들이 마치 삶에 지친 형국으로 구부정하게 서 있었지요. 옆구리엔 온갖 풍상을 겪은 이의 아픈 상처처럼 휑하게 뚫린 구멍이 여럿 있어 백주대낮에도 좀은 섬뜩했던 곳이 그 굴헝입니다. 어떤 이들의 말로는 이 느티나무 구멍에 구렁이가 산다고 했고, 또 어떤 이의 말로는 도깨비가 산다고 했지요.




어느 비 오는 밤이었답니다.

마을의 힘깨나 쓰는 기백이 아재가 읍내에서 술에 잔뜩 취해 홀로 그 느티나무 굴헝을 지나올 때였지요. 느티나무 개굴창에서 기어 올라온 도깨비가 기백이 아재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싸움을 걸었다지요. 아재는 도깨비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고, 끝내 그 놈을 느티나무에 단단히 묶어두고 왔는데, 이튿날에 가보니 난데없이 몽당 빗자루 하나가 묶여있더라는 말은 오래오래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느티나무 굴헝은 그렇게 좀 으스스한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어이넘어고개는 자연히 이런저런 일로 그야말로 어이 넘는 고개가 되고 말았던 거지요.



이런 무섬증 나는 이야기가 있어 우리가 살던 마을의 아이들은 자연히 담력이 커졌을 테고, 세상과 싸워 이겨낼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을 하였겠지요.

이 어이넘어고개와 느티나무 굴헝 이야기 따위는 그 옛날의 시골이라면 어디든 다 있었지요. 우리는 어린 시절을 이런 이야기와 함께 살았지요. 그래서 험한 세상을 건널 때에도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며 참고 견뎌내며 살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던 고향의 그 고개와 그 굴헝은 없어진지 오래 됐습니다. 고개는 다 깎여나가 평평한 포장길이 됐고, 느티나무 굴헝이 있던 자리엔 엉뚱하게도 아파트촌이 섰습니다.



어이넘어고개도 없고 느티나무 굴헝도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떤 힘으로 살아가게 될까요? 그런 스토리들을 만들어내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에 우리는 그런 스토리들을 아무 생각없이 버리고 삽니다. 말로는 3만불 타령을 하면서 실제로는 1만불도 못 되는 문화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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