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 4

호박과 자유와 오래 된 오해

호박과 자유와 오래 된 오해 권영상 부끄러운 일이지만 3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하루도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 말은 단 하루도 직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며, 단 하루도 아침 식사라는 오래된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 시절 나는 나를 스스로 잘 옭아매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여겼고, 잘 순응하는 것이, 그 질서에 잘 길들여지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 두면서부터 나의 아침밥 강행군도 끝났다. 시골에 조그마한 텃밭을 마련하면서 나는 완고한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것은 순전히 호박 때문이다. 땅 한 켠에 비스듬한 바위 둔덕이 있었는데, 집을 안내해준 분이 말했다. “여기에 호박덩굴을 올리시면 호박 맛을 제대로 보시겠네요.” 나는 그 말..

설거지 그리고 배추꽃 사과

설거지 그리고 배추꽃 사과 권영상 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영하 17도의 혹한 엄습도 한두 차례가 아니다. 한 주일 고비를 넘기고 나면 숨 돌릴 사이 없이 더 무서운 혹한이 찾아온다. 조금 흘려놓은 시골집 수돗물을 단속하러 나는 겨울 내내 안성을 오르내렸다. 딸아이는 대학에서 가져온 프로젝트로 밤을 새우고, 아내는 전시 작품이 촉박하다며 집안일에 손을 놓은지 오래다. 오늘은 설거지 일로 싫은 소리가 오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는 얼른 집을 나섰다. 가끔 가던 도서관을 찾았다. 나 같은 처지의 남자들이 거기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힘들여 찾아간 그 곳을 나와 혼자 추운 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길옆 카페에 찾아 들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따스한 분위기에 마음을 막 녹이고 있을 때다. 들어..

호박과 코 베 갈 추위

호박과 코 베 갈 추위 권영상 올겨울은 제법이다. 겨울 구실을 좀 한다. 겨울 예고편도 없이 곧장 기온을 뚝 떨어뜨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눈발을 날린다. 치고 드는 품이 어디서 많이 본 솜씨다. 연일 영하의 강추위를 예고한다. 지금대로라면 겨울 맛을 제대로 볼 것 같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절에 좋은 음식이 있다. 호박죽이다. 방금 끓인 호박죽을 후후 불어 먹는 맛은 일품이다. 오랫동안 호박은 주로 대형마트에서 구했다. 그러던 것이 끝내 안성 텃밭 한 귀퉁이에 호박 심을 자리를 지난해에 마련했다. 예전 아버지하시던 걸 보면 4월쯤 남녁 담장 밑에 호박 구덩이를 한껏 파시고 거기에 잘 삭힌 뒷거름을 가득 채우셨다. 그렇게 땅을 살찌운 뒤 호박씨를 넣고 봉분처럼 둥글게 흙을 덮으셨다. 그러고 한 보름 지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