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한 여행
권영상
이메일함을 열면 가끔 만나는 편지가 있다. 20여 년 전 내게 국어를 배운 제자 k다. 그는 이제 서른 후반, 맨해튼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와 예쁜 딸 하나를 둔 철없는 아빠다. 서로 종이편지나 이메일을 주고받고 사는지도 20여 년이나 된다.
같이 술도 먹고, 같이 놀기도 하는 사이.
그가 얼마 전 내게 전화를 했다.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그보다 훨씬 오래 살긴 했지만 사는 게 뭐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철없기는 그와 다를 게 없다.
그가 말하는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그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해방감을 맛보러 결혼한 친구 셋이서 각각 제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몰래 여행을 떠났단다. 1박 2일. 변산반도 어느 일몰을 볼 수 있는 근처에 펜션을 잡아놓고 밤늦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 한 잔씩을 걸치고 있을 때였다. 친구 중 한 명이 제 아내에게 들통 나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아니, 저런!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물었더니 제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밤에 서울로 불려갔어요. 치밀하지 못한 친구였어요.”
그의 아내를 탓하는 게 아니라 그 친구의 치밀하지 못함을 탓했다. 속이긴 속였는데 금방 들통 나도록 속여 그 밤에 기습적인 전화를 받고 불려가다니! 나는 속으로 웃었다. 부모님을 속이고 먼데 놀러갔다가 붙잡혀 돌아온 중학생들 같았다. 자식을 하나씩 가진 어린 아빠들이라 그런지 너무나 철이 없었다. 마치 져도 그만인 게임을 하듯 재미삼아 하는 가정생활 같아 재미있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지엄한 아내를 대체 어떻게 보고 저러는지.
“나중에 들통 나면 너 큰일이다. 각오해라.”
내 말에 k가 시큰둥했다.
큰일 나면 큰일 나는 거지요 뭐. 손들고 있으라면 손 한번 들고나면 끝이에요, 그러는 투였다. 아내라는 이는 그 꼬투리를 평생 가져가면서 남자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어쨌거나 아직 들통 나지 않은 것만도 천행 중에 천행이었다.
“선생님! 밤중에 제 와이프한테 불려간 녀석 누군지 아세요? 어쩜 아실 걸요.”
그가 생뚱맞게 물었다. 나는 그가 나와는 먼, 그저 k의 친구로만 알았는데 내가 아는 인물이라니! 나는 그가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택이라고. 선생님, 진택이 아시죠? 3학년 때 3반. 연애편지 쓰다 걸린!”
나는 비명을 지르듯 조진택? 하고 소리쳤다. 연애편지도 연애편지지만 소풍길에 곁길로 샌 애들 붙잡아오겠다고 추노꾼처럼 날뛰던 그 녀석.
웃겨도 너무 웃기는 일이다. 하필 그 녀석이 제 아내에게 잡혀 가다니! 그도 웃고 나도 웃고, 한참 웃는 중에 그가 맥 빠진 말을 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여행 기분도 못 내고 다들 터덜터덜 올라왔어요! 사는 게 뭔지 참 모르겠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한 번 더 가야겠죠?
그는 정말이지 아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밤 강아지였다. 그런데도 나는 응, 그래야지! 했다. 암만 내가 왕년에 그들을 가르쳤다 해도 숨 막히는 결혼생활에서 잠시 비켜나 보려는 그들의 꿈을 허물어버릴 수는 없다.
제발 제 아내에게 불려간 조진택! 별일 없기를! 그리고 좀 치밀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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