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등짝을 때리시던 아버지의 손길
권영상
전철에서 내려 출구를 나서자, 벌써 사위가 어둡다. 가로등 켜진 플라타너스 길을 걸어가는 저쯤 앞에 젊은이 둘이 비틀거리며 가고 있다. 날도 으스스한 가을밤, 술 한 잔을 한 모양이다. 비틀거리던 한 친구가 급기야 플라타너스를 껴안더니 주르르 주저앉았다.
“너 오늘 너무 많이 마셨다구!”
함께 걷던 친구가 쪼그려 앉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논다고 술도 못 먹어?”
플라타너스를 껴안고 주저앉은 이가 잔뜩 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그들 곁을 지나고 있었다.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직장을 잃었다거나 처음부터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은 젊은이들 같았다.
그 옛날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에도 취직은 쉽지 않았다. 내가 대학이라고 나올 무렵만 해도 그 좋던 중동 특수가 끊겨 2년이나 구직 고행을 해야했다. 그때 나는 주로 건축물 공사장을 돌았다. 아무 기술이 없던 나는 모래나 자갈을 질통에 짊어지고 3,4층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자주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일도 막히면 아버지 농사일을 거들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1년 2년을 버텨내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낡은 소설이나 집어 읽는 게 전부였다.
산다는 일이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임시로 방송국 송수신소에 경비를 서고, 임시로 비어있는 고가를 지켜주고, 임시로 가정교사를 하고, 임시로 학교 강사 일을 하고, 임시로 문학전집 방문 판매를 했다. 그때 나는 임시 인생이었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임시로 땜빵 하는데 쓰이는, 그러다가 소용에 닿지 않으면 버림받는 소모품 같은 삶이었다.
그때 나를 아는 이들은 나를 보면 그랬다. “힘내!”, “용기를 가져!” 그들은 나를 위로한다며 친구로서, 선배로서 그런 말을 했겠지만 그때 내게 그런 말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빈정대거나, 측은해 하거나, 딱해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싫은 줄 알면서도 주저앉기만 했다. 사막 앞에 선 것처럼 내 목이 탈 때 내가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이웃동네 바닷가 마을이다. 쇠락해 가는 그 마을엔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고깃배를 타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 좋았다. 직장이 있고 없고 뿐 내일이 캄캄하긴 서로 마찬가지였다. 어느 밤은 그들과 술을 마시고 어두운 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버지가 홀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방황하는 아들의 손을 잡은 예순의 아버지는 술 취한 내 등짝을 한 대 때리셨다. 그리고는 말없이 집까지 나를 데려가 이부자리를 펴주셨다.
나는 그 날 밤, 혼자 울었다. 아버지로부터 맞은 그 손길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건 힘을 내라느니, 용기를 내라느니, 그런 말과는 너무도 다른 나를 울리는 감동이었다.
그 후 나는 내 길을 찾아 나섰고, 어느덧 그때의 아버지 나이에 와 있다. 지금도 가끔 나는 내가 가는 길에서 벗어나 방황할 때면 그 시절 내 등짝을 치시던 아버지의 손을 떠올린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큰 위로의 손길을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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