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상처투성이 그녀

권영상 2015. 11. 13. 12:55

상처투성이 그녀

권영상

 

     

 

벤치에 앉아 있는데 그녀가 불쑥 내 무릎에 앉았다. 순간 잔잔하던 내 마음이 술렁, 요동쳤다. 그녀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는 그녀가 좋았다. 묵묵히 지켜만 보는 그녀보다 내 무릎에 냉큼 내려앉는 발칙한 그녀가 좋다. 욕심 같지만 그녀가 늘 그렇기를 바란다. 그녀는 초록바탕에 빨간 테두리가 있는 옷을 입었다. 노랑 일색의 가을 패션 트렌드와 달리 좀 강렬한 이미지의 옷을 입었다.

 

 

 

그녀가 애원하는 눈길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볼수록 사랑스럽다. 귀엽다. 깜직하다. 자신을 내게 맡기는 한 그런 표정이 나는 좋다. 나는 그녀를 내 무릎 위에 오래 오래 앉혀두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집어 들었다. 보기와 달리 가볍다. 이 산자락이 그녀의 집이고, 그녀가 거처하는 곳이 여기이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바람 많은 세상과 마주하며 살아내느라 그녀의 몸은 해쓱해졌다.

 

 

 

제 몸 하나를 위해 산 듯 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감수하며 살았다. 그녀의 몸을 들여다보면 안다. 험난한 세파와 맞서느라 온전한 데가 없다. 일생동안 햇살을 받아 내리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바람과 싸우고, 바람에 휘둘리느라 긁히고 찢어진 상처가 여기저기 역력하다. 상처 없는 곳이 없다. 그뿐인가. 벌레에게 먹히거나, 군데군데 병든 자국마저 눈물처럼 찍혀있다.

 

 

 

나는 일어나 그녀가 살아온 터전을 바라본다.

산자락 길옆에 선 중국단풍나무가 그녀의 집이다. 붉고 화사한 잎을 보기 좋게 달고 있다. 참나무 팥배나무 오리나무 일색의 이 산자락에서 유독 붉은 빛을 띠고 있다. 튤립나무인가 하면 아니고, 백합나무인가 하면 또 아니다. 태생이 요염하고 예쁜 튤립꽃 모양의 잎을 가진 중국단풍나무다.

 

 

 

나무도 이 수림 속에서 살아내느라 다른 나무들과 끝없이 경쟁했다. 볕드는 땅을 한 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햇빛 한 줌이라도 더 받아 내리기 위해 나무는 주말도 없이 일했다. 숲은 평화롭고, 생로병사가 없는 경건한 곳이라 하지만 그건 숲을 모르는 말이다. 숲에도 쉬지 않고 바람이 몰아치고, 쉬지 않고 단백질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 결과 폭우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엔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나무가 부지기수다.

 

 

 

비탈에 선 나무들은 하루도 긴장하지 않는 날이 없다. 쓰러지지 않았다고 안도할 일이 아니다. 힘 약한 이웃나무가 쓰러져 덮칠 때에는 평생 그 무게를 대신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가 내뱉는 신음이며 그의 병고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단풍나무가 바깥에서 들어온 이민자이고 보면 살아내는 일이 더욱 힘들다.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때로 소통되지 않는 적막감에 휩싸일 때가 많았겠다. 바라보기에 나무가 거느린 잎들이 화사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그녀처럼 상처 없이 살아낸 잎은 없을 거다.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들 모두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처럼 상처투성이다.

 

 

 

나는 상처 많은 그녀를 춥고 바람 많은 땅 위에 버리고 싶지 않았다. 윗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거든 한때 즐겨 읽던 책갈피에 넣어주어야겠다. 무엇보다 지친 그녀에겐 길고 오랜, 그리고 푸근하고 편안한 잠이 필요하다. 그 어느 날, 말쑥하게 살기만을 바라는 내가 미워질 때 책속에서 상처투성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