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컴퓨터와 까치집

권영상 2012. 6. 21. 11:43

 

컴퓨터와 까치집

       

                     권 영 상

 

 

운동장 곁, 커다란 은행나무 우듬지에 까치집이 있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 내다보면 괜히 시골 정취를 느낀다. 그깟 까치집 하나에 뭐 정취까지 들먹이냐 하겠지만 도심에서 까치와 까치집을 본다는 건 반갑다.

 

고향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 건너편엔 미루나무 숲이 있었다. 구름에 닿을 듯 키 큰 미루나무 꼭대기엔 여기저기 까치집이 있었다. 바람 불 때 창가에 서서 미루나무 숲을 건너다 보면 미루나무잎들이 손을 흔들며 요란하게 찰찰댔다. 그런 날은 으레 까치들이 춤을 추듯 바람을 타며 하늘을 날았다.

 

요즘도 가끔 바람 부는 날, 수업을 하다 창밖을 내다본다. 연둣빛 새순이 마구 돋는 은행나무 위로 까치 두 마리가 춤을 추듯 둥지 위의 높다란 하늘을 난다. 남대문로의 거대한 금융가 빌딩을 배경으로 한 까치들의 춤은 때로 외로워 보인다. 까치가 외로운 대신 그래도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약간의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까치 한두 마리의 생명이 별것 아닌 듯해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줄 때가 있다.

 

 

근데 엊그제다. 잠시 햇빛을 보러 운동장에 나갔는데 승용차 한 대가 느닷없이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사내 둘이 승용차에서 총을 들고 내렸다. 그들은 다짜고짜 은행나무 쪽으로 달려가더니 은행나무 우듬지에 앉은 까치 두 마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들을 바라봤다. 둔탁한 총소리와 함께 까치 한 마리가 운동장 바닥에 떨어졌다. 그들은 까치 모가지를 비틀어 잡아들고 와서는 저들이 타고 온 승용차에 올랐다. 나는 다가가 대체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한전에서 왔습니다. 이놈들이 전력 공급을 자꾸 방해해서.”

그들은 죽은 까치를 들어올려 보이더니 놓친 까치를 잡겠다며 부랴부랴 교문을 나갔다. 망연히 서 있는 내게 학교를 지키는 분이 다가와 저 까치 잡겠다고 벌써 몇 번이나 왔었다고 귀뜸을 했다. 내가 까치로부터 위안을 받으며 살아오는 동안 까치들은 공포에 떨며 하늘을 날았던 거였다.

 

근데 이 도심에 내가 알고 있는 까치집이 또 하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있다. 전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한길가 빌딩 위에 있다. 검정 대리석으로 지은 컴퓨터 회사 빌딩이다. 굉장히 높은 그 빌딩 꼭대기 벽면에는 큼직한 그 회사 이름이 박혀 있다. 까치는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아래에서 쳐다보면 그 높이가 까마득하다. 언제부턴가 까치는 그 높은 곳 글자 위에다 나뭇가지들을 물어와 집을 지었다.

 

가끔 퇴근길에 둥지를 쳐다보면 지상에서 다 사라진 석양이 거기 그 빌딩 끝머리인 까치집에 고물고물 노랗게 머물러 있는 걸 본다. 그때마다 혼자 생각에 아하, 까치가 일몰을 오래도록 보려고 저기에다 둥지를 틀었구나 했다. 아닌게 아니라 까치는 둥지에 앉아서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고 있다. 노을이 잦아들면 날아오르기도 하고 애절하게 깟깟깟 울기도 한다. 그러는 그 정경이 때로는 신비하기까지 하다.

 

현대문명의 상징인 컴퓨터 회사 빌딩과 문명에 의해 쫓겨날 판인 외로운 까치.

불편한 고층 빌딩의 벼랑 끝에서 간신히 동거하고 있는 그 둘의 모습이 위태롭기는 해도 아름답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자기네 회사 이름이 까치집 때문에 훼손되는데도 해코지하지 않고 그냥 둔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그 점이 너무도 기특하다. 그러면서도 또 누군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까치를 향해 총구를 겨냥하지 않을까 두렵다.

 

이 세상엔 문명만이 존재할 수 없다. 문명과 정취, 문명과 풀꽃, 문명과 까치집 한 채가 공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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