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영혼이 부끄러울 때
권 영 상
뒤뜰에 화분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그 마른 화분엔 목숨을 잃은 여린 나무 한줄기가 비틀려 있었다. 언젠가 서아시아의 어느 고성에서 본 부켄베리아였다. 죽은 줄 알았는데 가지 끝엔 오래된 추억처럼 작은 숨결 하나가 간신히 머물러 있었다. 왠지 그의 숨결을 살려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작은 숨결 하나, 그것에 기대를 걸고 낡은 화분의 마른 흙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뒤뜰을 뒤져 새 흙을 담았다. 나름대로 공을 들여 부켄베리아를 옮겨 심은 뒤 내 방에 데려와 창가에 두었다. 물을 줄 때도 함부로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흙을 짚어 물기가 가늘게 느껴질 때에야 주었다. 함부로 흠뻑 물을 주면 뿌리가 상할지 모를 터였다. 그러느라 며칠 동안 정이 들었다. 일을 하다가도 또는 잠시 쉴 때에도 마음이 자꾸 그리로 쏠렸다. 별게 아니라면 별게 아닌 것에 애정을 쏟긴 처음이었다. 어쩌면 부켄베리아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보다 내 먼 추억을 살리고 싶은 마음 탓인지도 몰랐다.
닷새가 지나자 마른 가지 끝에 붙은 푸른 숨결이 글버딛고 살아나기 시작했다. 살아난 목숨은 하루가 다르게 파릇파릇 커주었다. 그 파란 빛조각을 볼 때마다 나는 행복했다. 내 보잘것없는 손길에 누군가의 목숨이 살아난다는 게 기뻤다. 더구나 지난 갈증의 고통을 잊고 다시 일어서는 일이 놀라웠다.
‘지붕위의 철학자’에 보면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은 작은 기쁨에도 바로 기뻐할 줄 안다는 글이 나온다. 부켄베리아가 그랬다. 오랫동안 목마름에 고통 받았을 그가 내 작은 손길에 이렇도록 빨리 기뻐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가 버림받은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았다는 거다. 한 모금의 물만 주어지면 언제고 다시 살아날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내게로 온지 스무 날이 지난 부켄베리아는 아직도 부실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부실한 몸으로도 햇살이 내리면 초록 잎을 반짝인다. 다시 봄을 보는 기분이다. 어쩌면 내년 봄쯤이면 부켄베리아는 내 추억속의 그 붉고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될지 모른다. 나는 벌써부터 행복하다.
하지만 잠깐, 부켄베리아를 보는 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의 삶이 늘 충분한 것에 익숙해 진 것 같아서다. 밥 끝에 마시는 숭늉 한 모금도 나는 넉넉하길 바랐다. 내 안의 추억들도, 일과를 마치고 몸을 뉘이는 수면도 언제나 넉넉하길 바랐다. 나는 그 동안 모든 것에 배불러 있지나 않았는지.......
그렇기에 나는 가끔 가난한 부켄베리아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작은 기쁨에도 감동할 줄 모르고, 작은 슬픔에도 눈물 흘리지 못하는 나의 배부른 영혼이 부끄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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