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누구나 외로움에 취약하다
권영상
저녁밥을 먹고, 길을 걷기 위해 마을길에 들어섰다. 1시간쯤 걸리는 성당까지 갔다오는 내 나름의 저녁 운동이다. 밤 8시. 가로등이 있을 뿐 실은 어두운 시간대다. 그래도 나처럼 밤길을 걸으러 나온 이들이 드문드문 있다. 그들은 어깨를 흔들며 운동다운 운동을 하며 씩씩하게 걸었다. 거기에 비하면 내 걸음은 느리고 촌스럽다.
진흥아파트를 지나면서부터 느티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잘 만들어진 길보다 울퉁불퉁한 숲길이 좋다. 왼쪽은 고속도로이며 오른 쪽은 강남대로를 따라 즐비하게 서 있는 고층빌딩들이다. 내가 느티나무 사잇길을 20여미터 걸어들어갈 때쯤이다. 앞쪽에 켜져 있는 어슴프레한 가로등불 아래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느티나무 사잇길로 걸어들어갔다.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울음소리는 거기서 났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다. 어깨를 들먹였다. 작은 소리지만 아픈 울음이었다. 출근용 가방과 종이백이 그녀 옆에 말없이 놓여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 벤치 앞을 얼른 지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렇게 얼른 지나가주는 내가 그녀 보기에 야박스러울 것 같았다. 누군가 혼자 우는 걸 보고 그 앞을 싹 지나가는 것이 아름다운가.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혼자 울게 버려두어야 하는가. 그런 순진한 마음 때문에 내가 미안해졌다. 나는 지금 운동중이야. 내 건강을 위해 나는 바쁘다구. 그깟 눈물쯤 촌스럽게. 바보 같이! 그러며 휙 지나가는 내 걸음걸이에서 행복 느낌이 풍길까봐 그만 터덜터덜 걸었다.
그녀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자꾸 그녀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다. 그녀는 왜 거기서 울고 있을까. 혹 직장을 잃은 건 아닐까. 그녀 옆에서 그녀의 울음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출근용 가방과 두툼하던 종이백이 떠올랐다. 힘들게 일자리를 구했는데, 보수가 적고, 하는 일이 많아도 일자리를 잃는 게 두려워 참으며 견뎌왔는데, 끝내 오늘 그 일자리를 잃었던 건 아닐까. 어두워가는 줄 모르고 우는 울음이라면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 걸까. 위로받을 친구도 없고, 오로지 혼자 울고 혼자 삭혀야할 사랑이기에 여기 이 숲에 와 혼자 우는 걸까. 발에 차일만큼 사람 많은 이 도시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이란 모랫벌에서 겨자씨를 찾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이 도시다. 아픈 이별 때문에 우는 눈물이라면 그 여자의 마음은 또 얼마나 지금 외로울까.
돌아오는 길에도 그 벤치로 눈이 갔다. 뽀오얀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벤치에 여자는 아까처럼 얼굴을 감싸고 앉아 그대로 울고 있다. 찬 가을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자상한 분이 그녀에게 훌훌 털고 일어서라고 달래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다가 돌아다 보니 그 일을 느티나무들이 대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 감싸주는 것도 같고, 등을 도닥이며 달래주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 그녀 곁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든 시골이든 숲은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다. 마음에 맺힌 울음을 흐느껴 울어도 다 받아줄 것처럼 아늑하다. 그러기에 여자는 그 숲을 믿고 그 숲에 기대어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숲을 나오니 깨끗한 달이 밀림같은 아파트 숲 위로 떠올랐다. 사람이 아무리 타인을 잘 위로하고 타인의 상처를 잘 보듬어준다 해도 자연만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은 때로 위로받는 일을 사람보다는 나무숲에서 찾고, 허공에 뜬 달님에게서 찾고, 발밑에 핀 작은 들꽃 한 송이에서 찾는다. 아파트 위에 뜬 저 말없는 달의 따스한 미소를 본다.
사람이란 생각할수록 약한 존재다. 채 한줌도 되지 않는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것에 한없이 취약하다. 특히 조락하는 가을에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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