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쪽에 서라
권영상
“애 데리러 나가봐요.”
연신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던 아내가 나를 조른다.
밤이 늦다. 11시다.
“어른도 이 밤에 혼자 다니기 무서운데...”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나를 아내가 은근히 또 재촉이다.
방학 중이어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애는 늘 바쁘다. 저녁이면 학원에 나가 이처럼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일이 많다.
우리가 사는 집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다. 딸애가 버스를 타고 와 내린다면 먼 쪽 아파트 상가 뒤에서 내려야 한다. 상가 모퉁이를 돌아 건널목을 건너기까지는 대체로 밝은 길이다. 그러나 건널목을 건너면 인가가 뜸해서 무섭다면 딸애에겐 무서운 밤길이다.
나는 우산을 들고 컴컴한 빗길을 걸어 건널목 앞에 가 섰다. 서로 길이 어긋날 염려가 없기 때문에 보통은 여기서 기다려 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딸애는 오지 않는다.
그 때, 행인이 없는 저쪽 상가 쪽 가로등불 밑에 딸애만한 모습이 보였다.
“나래냐?”
나는 딸애를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불렀다.
그때 내 귓가에 “영상이냐!”하고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시골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는 집에서 십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그 길에는 귀신이 산다는 늙은 느티나무 숲이 있었고, 밤이면 호랑이가 나온다는 고갯길도 있었다. 가급적이면 우리들은 그런 이유로 밤길을 피했다. 그러나 가끔 늦은 밤에 혼자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
달도 없이 깜깜한 밤, 늙은 느티나무 숲이 저만큼 보이면 두려움에 가슴이 뛰었다. 발자국 소리에 귀신이 뛰쳐나올까봐 발끝을 세워 걷다가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냅다 달음박질치기 일쑤였다. 거기를 간신히 지났다 해도 또 기다리고 있는 건 으스스한 고갯길이다.
그날도 비오는 밤이었다.
책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숨죽여 걷고 있을 때였다.
“영상이냐?”
컴컴한 저쪽 고개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어둠에 묻혀 들려왔다.
마중을 나오신 아버지였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어쩌면 아버지는 날이 저물 때부터 고갯길에 와 서 계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이나 간격을 두고 나를 부르고 계셨다. 아버지가 여기쯤 있으니 두려워 말고 밤길을 오라는 신호임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아직 먼데 서 계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은 귀에 들릴 듯 말 듯하지만 거기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도 일순 사라졌다. 그런 탓에 무섭기만 하던 늙은 느티나무 숲도 천천히 걸을 수 있었고, 그때에야 비로소 길섶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여유있게 들으며 걸었다.
“자, 이쪽에 서라.”
나를 보자, 아버지는 비가 들이치는 쪽에 서시며 내 쪽으로 우산을 씌우셨다. 이미 온 몸이 젖을 대로 다 젖었는데도 아버지는 당신의 몸으로 비를 막아주셨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내가 껌껌한 밤길을 걸어올 때면 늘 고갯길에서 나를 마중해 주셨다. 그러나 정작 그러셨던 날을 손꼽아 보면 단 하루 뿐인 듯 하다.
단 하루! 단 하루 아버지가 나를 마중해 주셨는데도 아버지가 늘 나를 마중해 주셨다고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 깜깜한 내일을 종잡지 못할 때 간간히 저쪽 앞길에서 영상이냐? 그러며 나를 불러 안심시켜 주시던 아버지가 이밤에 떠오른다.
어둑한 가로등불 밑에 딸아이의 그림자가 보인다.
“나래냐?”
나는 예전 아버지가 그러셨듯 어둠속을 향해 딸아이를 불렀다.
내 목소리에 딸아이가 비를 맞으며 달려온다.
나는 딸아이의 무거운 가방을 받으며 비가 들이치는 쪽에 섰다.
“자, 이쪽에 서라.”
아버지가 그러셨듯 내 몸으로 비를 막으며 딸아이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웠다.
“아빠, 고마워!”
딸아이가 내게 그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핑, 눈물이 돌았다.
그 옛날,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내 회한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도 미련하여 그 시절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권영상 산문집 <뒤에 서는 기쁨>(좋은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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